떡국이 없어도 한복이 없어도 돼

새해 첫날, 즐거웠으면 그만이야.

by 안녕

어젯밤부터 눈이 오기 시작하더니 오늘 아침엔 완연한 겨울왕국이다. 일찍 자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을 것이라고 꼬드겨서 재웠는데 웬걸.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음력으로 1월 1일. 까치까치 설날 말고 우리 우리 설날인 오늘을 더 행복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괜스레 뿌듯하다. 내가 내리게 한 것도 아니면서.


엊저녁에 떡국을 먹은 탓에 아침엔 다른 게 당겼다. 한창 '헤이 지니'에 마음을 빼앗겨 고작 5살의 나이에 직업의 세계에 홀랑 빠진 딸에게 슬쩍 물으니 저도 떡국은 싫다 한다. 한참을 고민하더니 볶음밥, 하며 외치는데 내 딸이다 싶다. 볶음밥은 내가 가장 좋아해서 자주 만드는 메뉴다. 마침 어젯밤에 본 유튜브에서 해 먹은 김치볶음밥을 먹고 싶었다. 잘 됐다. 이 정도면 메뉴 통일.


알맞게 고슬고슬한 밥을 지어 적당히 다진 야채와 두부를 섞어 볶음밥을 만들어 두고 냉장고에서 푹 쉬어버린 김치를 꺼내 쫑쫑 썰어 볶았다. 처음엔 식용유에 볶다가 밥을 넣고, 마지막에 고추장, 참기름, 그리고 깨소금을 뿌리면 내 입에 딱 맞다. 계란 프라이는 느끼하니 대신 계란 세 알을 톡톡 까서 휘휘 저은 후 스크램블 에그를 준비하기로 한다. 부드럽고 고소해서 볶음밥이나 카레에 얹어 먹어도 좋다. 슬쩍 딸을 부른다. 딸~ 엄마가 도움이 필요해~!


뭔데 뭔데, 하며 달려온 녀석은 파이렉스 계량컵에 들어있는 계란 세 알을 보고 환호성을 지른다. 이것 좀 잘 저어줄래? 하면 응!! 하며 얼른 받아가는데 마치 의욕 가득한 신입사원이 중대 프로젝트를 처음 맡을 때 같은 모습이다. 처음엔 불안했는데 생각보다 잘해서 요새는 계란물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딸에게 맡기고 있다. 처음 해보는 녀석은 마음도 성격도 급한 나보다도 더 신중하고 신중하게 휘휘 저어주기 때문에 몇 분 있다가 받아보면 아주 곱고 노란 계란물이 완성된다.


볶음밥이 두 개나 완성될 동안 쉴 새 없이 저어댔던 곱고 고운 계란물을 살짝 달궈진 프라이팬에 올려 적당히 섞으며 익힌다. 덜 익혀야 더 부드럽지만 아직 미취학 아동에겐 부담일 수 있어 바싹 익힌다. 덜 부드럽지만 더 안전하다. 식판엔 야채 볶음밥을, 그릇에는 김치볶음밥을 얹어 밥상을 대충 꾸린다. 아참, 국물 없이 밥 못 먹는 병에 걸린 나를 위해 급하게 만든 미소된장국도 한 그릇 담는다. 간편하면서도 맛이 좋아 아주 든든한 녀석이다.


다 됐다~ 먹자! 하며 식탁에 앉기로 한다. 사실 딸만 자기 식탁이고 나는 그냥 대충 쟁반에 밥, 국, 김, 따위를 놓은 후 평소 글 쓸 때 쓰는 이케아 미니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다. 엄마는 왜 거기서 먹어?라고 묻는데 그만 귀찮아서,라고 솔직히 답해버렸다. 다행히 왜?라고 되묻지 않는다. 순식간에 다 먹어버린 나와 다르게 딸은 여전히 뜨는 둥 마는 둥. 멋쩍은 나는 옆에 앉아 오늘 남은 시간을 뭘 하고 보낼까 궁리한다. 밥을 다 먹고도 오전 10시가 안 되었다. 대충 밤 10시에 재운다고 하면 아직도 12시간이나 남아있다. 오 마이 갓. 이럴 수가.


휴일에 혼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1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시간을 확인해보면 겨우 5분이 지나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와의 놀이는 반복이 대부분이라 훨씬 재밌고 자극적인 휴대폰을 수시로 들여다보게 된다. 최대한 안 하려고 하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아침부터 휴대폰을 만지작 거린다. 뭘 하고 놀까, 뭘 하고 놀아야 하루가 금방 갈까. 그때 문득 밖에 지천으로 쌓인 눈이 생각난다. 눈, 그래 눈!


평소 같으면 절대 안 나갈 성격이다. 추운 겨울에 나갔다가 감기에 걸리면 끝장이다. 신생아 때부터 갔던 소아과는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다. 운전을 못하는 나로서는 절대, 이 추운 겨울에 가고 싶지 않은 거리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 하루가 길다. 혼자 본가에 간 남편이 없으니 놀이는 온전히 나의 몫. 집에서 사부작사부작 논 것으로는 절대 에너지를 뺄 수 없다. 설거지를 하면서 마음을 먹는다. 나간다. 무조건 나간다. 그냥 나간다!


나가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집안일 정리하면 12시. 그러면 12시 30분에 나가서 1시간만 놀고 들어온다. 그러면 대충 2시쯤 곯아떨어지겠지. 추운데 있다가 따뜻한 곳으로 오니까 아마 자연스럽게 잠이 쏟아질 거야. 이불은 개지 말자. 그대로 두자. 대신 나갈 때 옷은 두툼히 입히자. 괜히 감기 걸리면 진짜 지옥길 시작이니까. 장갑도 넉넉히, 바지 속엔 꼭 내복 입히고, 마스크에 목도리, 그쯤 하면 되겠지?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 그 위로 우리 둘의 발자국이 쉴 새 없이 찍혔다. 눈아, 미안해.



바깥세상은 생각보다 너무나 좋았다. 좀 전에 맞춘 겨울왕국 퍼즐 속 세상처럼 하얗게 하얗게 뒤 덮여 있었다. 눈은 꽤 많이 남아 있었다. 귀찮았던 마음은 사라지고 둘 다 너무 신나 놀이터로 달려가 버렸다. 잠시 걱정 따위 벗어던지고 동그랗게 동그랗게 눈을 굴리고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다. 대충 시작했던 것이 어느새 진심이 되어 딸 보다도 더 신나 그만 눈사람을 세 개나 만들어 버렸다. 나뭇가지 주워다 팔 만들고 잎사귀 주워다 눈, 코, 입 붙였는데 바람에 날아가버렸다. 그래도 웃기다며 우리 둘은 그만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깔깔 거리며 웃어 젖혔다.


유난히 사람이 없었다. 지나가는 구름 사이로 햇빛이 슬며시 비출 때를 제하고는 바람 때문에 너무 추웠기 때문이리라.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고 장갑에 붙은 눈을 툴툴 털면서도 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당장 내일이면 한 꺼풀 꺾여버릴 눈밭을 온전히 즐기고 싶은 마음, 코로나19 이후 제대로 된 바깥 놀이 한 번 해주지 못해 늘 미안했던 마음, 일전에 눈이 다 녹아 너무 슬프다며 울던 녀석의 순수한 마음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나는 생각했던 것 같다. 감기에 걸릴지언정,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깨뜨리지는 않겠다고.


덕분에 우리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마음껏 걸을 수 있었다. 녀석과 나의 걸음 뒤로 수없이 새겨지는 발자국을 뒤돌아 보며 별 것도 아닌 것에 즐거울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놀이터에 수북이 쌓여있는 눈을 보며 이쪽으로 와봐, 저쪽으로 가자, 를 외치며 우리 둘은 그렇게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렇게 행복했다.


곳곳에 숨겨진 눈사람을 찾는 것도 큰 재미였다. 우리처럼 전통적인 모양의 눈사람, 오리 모양의 눈사람, 어디엔가는 라이언 모양의 눈사람도 있었다. 50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눈사람까지 발견하고 딸은 신나서 달려가곤 했다. 눈이 잔뜩 내린 이곳은 그야말로 올라프 천지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집이다. 나의 작전은 성공했을까?


맞다. 성공했다. 늦은 2시쯤 들어온 우리는 온 갖가지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던지고 손을 닦고 이불속으로 쏙 들어갔다. 시린 발꼬락과 손꼬락을 꼼지락 거리며 잠깐만 눈을 붙이자고 했다. 5분이 채 되지 않아 녀석은 잠에 들었고 잠이 올리가 없는 나는 이렇게 일어나 오늘을 기록하고 있다.


새해 첫날이다. 개인적으로는 양력 1월 1일을 더 좋아하지마는 어쨌거나 오늘도 1월 1일이다. 떡국을 먹지 않아도 한복을 입지 않아도 우리는 꽤 많이 행복했다. 옛날처럼 MBC나 SBS, KBS의 명절 특집 방송을 보지 않았지만 우리는 즐거웠다.


시작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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