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급식 신청서 그리고 직장인 도시락 시즌2
아주 살짝, 고민했다.
새롭게 옮긴 직장. 낯선 사람들. 그 속에서 어우러 지내려면 아무래도 밥을 함께 먹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밥 한 번 먹자"가 인간관계의 시작이자 끝인 한국 사회에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선 점심 식사를 꼭 함께 먹어야 할 것만 같았다. 거기다 다니던 곳도 아닌 새 직장 아닌가. 안면을 트고 일을 배우고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는 '친목'이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상황에 회식까진 할 수도 갈 수도 없으니 적어도 점심만큼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너무 유난스러운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계속 망설인 것이 사실이다.
꼬박 하루를 생각하곤 결심했다. 이곳에서도 홀로 도시락을 싸서 먹어보기로. 혹시 번복할까 싶어서 얼른 미급식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신청 기간은 부러 길게 잡았다. 중간에 혹시 돌아갈 마음이 들까 봐 나름 미리 차단한다는 생각에서. 슬쩍 보니 생각보다 미급식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아 어느 정도 마음도 놓였다. 전 직장에서도 반년 동안 혼자 잘 먹었으면서 옮긴 곳에서는 눈치를 보는 게 씁쓸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워낙 관계 지향적인 데다 이런 상황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는 성격이므로. 수북이 쌓였던 신청서 종이가 얼마 안 남은 것으로 보아선 분명 나 말고도 몇 명 있을 터였다.
미급식 결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무래도 코로나(오미크론) 바이러스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혹은 백신을 맞아도 돌파 감염이 된다는 이야기에 막연한 공포가 있었다. 거기에 최근 아이 어린이집, 학교, 학원 등에서 우후죽순으로 퍼져 확진자 혹은 밀접접촉자 연락이 계속 오니 불안함이 증폭됐다. 하루에 한 번 꼴로 어린이집에서 공지사항이 오는데 가족의 확진으로 원아까지 확진된 경우가 왕왕 보이기 시작했다. 3차 접종까지 맞은 상황이긴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분명 작년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 게다가 이제는 확진이 되어도 경증인 경우엔 재택 치료를 하게 된다는 점, 격리 중 일상생활이 불편해진다는 점, 무엇보다도 우리 가족 모두가 나 때문에(?) 자가 격리가 되면 이제 겨우 5살인 어린 딸에게, 아무런 외출도 하지 않으며 2년 간 고생했던 남편에게 너무도 미안해질 것 같다는 점이 결심을 앞당기게 했다. (물론 백신 접종 유무에 따라서 격리의 일수와 방법이 약간 달라진다지만, 복잡해도 너무 복잡해 숙지하기가 어렵다)
또, 관계의 '선'을 지키고 싶었다. 친해지면 자꾸 '선'을 넘는 나를 애초에 제어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10년 전,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어렵게 취업한 첫 직장에서 너무 마음을 쓰며 살았다. 잘 보고 싶었던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에 늘 일을 떠안고 살았다. 내가 해야 할 몫의 일도 적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이 해야 할 일까지도 끌어안고 살았다. 저분은 아이가 있으니 집에서 일하기 힘들 거야, 저분은 나보다 연차가 낮으니 익숙하지 않겠지, 하며 일을 도와주었다. 아니, 도와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냥 다 해버렸다. 그러다 보니 칼 퇴근하는 직장에서 밤 9시, 아니 11시 가까이 일 한 적도 부지기수.
관리자들은 일 한 번 꼼꼼히 잘한다고 칭찬했지만 마음은 썩어갔다. 호의는 어느 순간 '권리'로 변한 듯 느껴졌고, 다른 동료의 곱지 않은 시선도 버텨야 했다. 내 앞에서는 웃으면서도 뒤에선 왜 저렇게 오버해? 저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괜히 안 하는 것 같잖아, 하는 시선들. 너 잘 났다, 하는 시선들이 등 뒤로 꽂히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지내다 보니 인간관계는 좁아지고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채 하루하루 버텼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어려워져 어느 순간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이상하게도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면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다 보면 친밀해지고, 그러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스스로 경계를 허물었다. 허물어진 경계 뒤에서 건강한 관계를 맺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쌓이고 쌓인 갈등이 어느 순간 폭발해 주변의 인간관계가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결심했다. 다신, 이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개인적 경험에 의한 비약일 수 있으나 적어도 나는 직장 생활에서는 굳이 가까운 사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일로 만난 사이'는 일 적으로만 깔끔하게, 문제없이 처리해주면 그만이란 생각이 지배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 내가 할 일은 깔끔하게, 남이 할 일은 적당히 봐서 적절한 조언만. 그러다 보니 회식을 하거나, 점심을 함께 하거나, 혹은 차 한 잔을 하더라도 개인적인 이야기는 잘하지 않게 됐다. 굳이, 부러, 나의 사생활을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도 맞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관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의 나를 제어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래도 예전 같았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니던 곳도 아니도 새로운 곳.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혼자 '도시락'을 싸서 먹겠다고 하는 것은 소위 '아웃사이더'가 되겠다는 선전포고라고 여겨 억지로 밝은 가면을 쓰거나 내 안의 '긍정' 에너지를 전부 소환해서 늘 즐거운 얼굴을 하며 사람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고 싶진 않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위협적인 상황에 내 건강을 위한 그리고 내 심신의 평화를 위한 선택만을 하고 싶다. 게다가 10년 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확실히 배운 것은 결국, '직장'은 '일'을 잘하면 된다, 는 것.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일을 못하면 어느 순간 '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나는 새 직장에서 '일'을 야무지게 배워서 잘해보도록 한다. 주어진 일을 최대한 빈틈없이 해결해 나가려고 노력해 보기로 한다. 대신 삭막하고 정신없는 회사에서 밥 먹는 시간만큼은 스스로 챙겨보기로 한다. 밥상머리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험담에서 멀어져도 보기로. 이곳은 따로 밥을 먹을 만한 공간이 마땅치는 않아 조금 걸리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꼭 밥을 함께 먹지 않아도, 굳이 커피를 같이 나눠 먹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내가 해왔던 '지치고 힘든' 관계가 아닌 '건강'한 관계를 서서히 맺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직장인 도시락 시즌 2가 새롭게 시작되는 중이다.
Photo by Avel Chuklanov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