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가 너무 아파지면 이렇게 됩니다.
위에 상처가 났네요. 역류성 식도염도 있고요. 당분간 약을 드시고, 커피는 안 드시는 게 좋죠?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 툭, 떨어졌다. 위에 상처가 났다는 말, 역류성 식도염이 있다는 말보다도 더 충격적인 것은 '커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커피를 먹지 말라니. 임신 정도는 해야 강력한 의지로 끊을 수 있었던 것을 이제 먹지 말아야 한다니! 커피로 시작해서 커피로 끝나는 광신도 같은 나의 삶, 하루에 다섯 잔은 기본으로 마시는 나의 삶을 전면 조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결국 오고 말았다.
몇 주 전, 위액까지 토하고 일주일 만에 위내시경을 받았었다. 도대체 내 위 상태가 어떻기에 이모양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다행이었는데, 밀가루 음식 정도만 조심하면 되겠지 싶었는데 웬 걸. 가장 사랑하는 나의 기호식품, 커피를 줄여야 한다는 것은(사실은 끊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지 못한 결과였다. 약을 타며 약사님께 슬쩍 물어봤더니 지금 위가 아파서 약 드시는 거 아니냐며 되묻는다. 멋쩍어하며 나오는 길 세상이 뿌옇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몇 번 커피를 홀랑 마신 적이 있다. 우유를 타면 괜찮겠지? 시럽을 넣으면 괜찮겠지? 따뜻하게 먹으면 괜찮겠지? 전부 다 괜찮지 않았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위는 커피 두 모금에 바르르 떨며 몸을 옥죄어 왔다. 그만 먹어, 그만 먹어라 진짜, 너 그러다 죽는다, 며 경고하는 것처럼 어느 날엔 커피 향만 맡아도 약간의 울렁감이 느껴질 정도로 거부했다. 이대로 고집부리며 더 먹다간 이번엔 정말 입원할지도 몰라, 하는 공포가 들이닥치자 싱크대에 막 입맛에 맛게 만든 커피를 쏟아부었다.
그렇게 시작된 커피와의 거리두기 4단계. 커피 향만 맡으면 지갑을 여는 나의 본능을 억제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고안해 실천하고 있다. 100% 성공률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해볼 만한 방법으로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다. 나는 커피를 어떻게 줄이고 있나?
먼저, 1단계. 난이도 하. 일단 커피를 탄다. 원래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얼음 다섯 개 넣은 시원한 거 말고, 40도 정도 되는 물을 부어 만든 미지근한 것으로. 그리고 마신다. 벌컥벌컥 아니고, 아주 조금씩. 마치 임금님 수라상을 기미상궁이 맛보듯 아주 조금 마시며 향기를 음미한다. 그리곤 위의 반응을 본다. 식도와 십이지장을 넘어 위로 가는 동안 아프진 않은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보며 천천히, 마신다. 그러다 절반 정도도 못 먹고 바로 위가 아프면 스톱.
2단계. 난이도 중. 향기를 느끼고 싶은데 위가 아프면 차를 타 마신다. 이왕이면 값싼 차 말고 조금 지출을 해 좋은 차를 선택하는 게 좋다. 나의 경우 커피는 속 쓰린데 뭔가 그 느낌을 주고 싶어서 산 차들이 꽤 마음에 들어 종종 이용한다. 오설록 차 중 '달빛 걷기', '동백꽃 티' 등을 주로 먹는데 향도 좋고 위에 부담도 없어 즐기게 됐다. 차 역시 카페인이 없는 것은 아니나 커피 보단 덜 부담되기에 편한 마음으로 마시게 되고 따뜻한 물과 같이 몸을 이완해 주어 좋다. 개인적으로는 동백꽃 티가 제일 입맛에 맞다. 다만, 차의 가장 큰 단점은 먹고 나서 티백이 남는다는 것.
그리고 3단계. 난이도 상! 차도 커피도 안 받을 것 같은 날엔 가장 기본으로 돌아간다. 바로 물! 물이다. 특히 영하 11도의 추운 날씨에 밖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들어온 날은 그 어떤 것보다도 따뜻한 물 한 잔이 큰 도움이 됐다. 개인적으로는 60도 정도의 물이 딱 좋은데 맞추기 힘드니 대~충 물을 섞어 원하는 온도를 맞춘다. 컵에 500ml 정도 따라서 홀짝홀짝 마시게 되면 추위에 떨던 몸도 차분해지고 전체적으로 편안해진다. 저절로 커피 생각이 나지 않고 위가 이완되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최근에 아프기도 하고 겁도 나서 자주 마셔봤는데 개인적으로 따뜻한 물 한 잔 마실 때가 가장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 같다.
마지막 4단계. 난이도 최상! 약간의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한 방법이긴 한데 꽤 효과적이다. 이 방법은 주로 회사에서 많이 쓰는 편이다. 스트레스를 받아 커피가 너무 먹고 싶을 때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건 내가 다 아는 맛!', '이건 내가 평생 먹어본 맛!'이라고!! 그러니 굳이 먹지 않아도 된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먹고 싶은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진다. 커피 생각이 나질 않고 다시 마음이 정돈된다. (일전에 쓴 글 <라면을 먹지 않기로 합니다>의 댓글 중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아주 잘 적용하고 있다)
분위기라는 게 있다. 회사는 늘 업무 스트레스가 몰아치기 때문에 순간 감정이 휘몰아치면 어느새 종이컵에 커피 한 잔을 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 휩쓸려 하루에 5잔도 넘게 마시다 위에 상처가 나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 아닌가. 그러니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어렵고, 가장 고되고, 가장 힘겹다. 때문에, 가장 고난도 단계라고, 생각한다.
쓰고 나니 웃프다. 그래도 나름의 방법을 적용해 꽤 많은 양의 커피를 줄였다. 하루에 4~5잔에서 지금은 이틀에 한 잔 정도 마신다. 남편의 부러 타주며 대리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원두가 추출될 때의 그 향기가 좋아 몇 번을 넘어갈 뻔했지만 아직까지 잘, 지키고 있다. 굳이 이런 단계까지 스스로 만들어 지키려고 하는 이유는 커피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당장의 마음으로 미친 듯이 마시다가 훗날엔 아예 먹지 못하게 될 까 봐, 아끼고 아껴 먹는 것이다. 오래, 오래 만나고 싶어서.
인간관계도 그렇지 않은가. 내가 너무 좋아 일방적으로 다가가면 상대와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적절한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있어야 그 관계가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다. 나 또한 사회 초년생 때, 혹은 학창 시절에 너무 좋은 나머지 질척이다가 끊어진 관계를 수 없이 많이 겪었다. 커피하고는 헤어지고 싶지 않다. 할머니가 되어도 브런치에 커피 한 잔 멋들어지게 마실 수 있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 조금 힘들어도 이렇게 거리를 두는 게 맞지 싶다.
때문에 난 계속, 커피와의 거리두기를 하겠다.
커피와 함께하는 삶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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