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향이 그리운 날에 한 잔
통근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바람에 보통 30분 정도 일찍 회사에 도착한 지 오래다. 모름지기 직장은 딱 맞춰 출근하는 게 정석이라지만 나는 사실 일찍 도착하는 게 조금 더 좋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의 고요한 분주가 참 좋기 때문이다. 막 뜨기 시작한 해가 말없이 쏟아붓는 햇빛도 사소한 움직임에 조금씩 부유하기 시작한 먼지의 흐름도 좋다. 짧게는 10분에서 길게는 20분까지. 일찍 왔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나에게 온전히 주어지는 그 시간이 언제나 값지다.
보통 도착하면 가장 먼저 어제 도착한 메시지들을 쭉 훑고 바쁘게 일을 처리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당장 처리할 급한 일도 없고, 주요 고객들도 지금은 방문하지 않는 시기이니 적당한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이곳에, 달달하면서도 쌉쌀한 향으로 가득 채우며 시작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모두 아는 그런 향 말이다.
일에 미쳐서 살 때(그래 봤자 불과 5년 전에) 밥 보다도 자주 먹었던 것은 믹스커피였다. 빈 속에 한 잔, 식 후에 한 잔, 그리고 집에 가서 밀린 일을 하면서 또 한 잔. 그렇게 기본 3잔을 마시고 중간중간에 기분 전환 겸 한두 잔을 더 마셨던 것 같다. 먹고 나면 텁텁함이 입 안을 감싸고 오래 머물수록 찐득찐득하게 들러붙는 구취가 참기 힘들긴 하지만 믹스커피가 주는 그 찐-한 맛을 잊을 수가 없어 꽤 오래도록 마셨다.
'카제인나트륨'이 위험하다는 태희 언니의 말도 가뿐히 무시하고 주로 먹던 것은 바로 '맥심 모카골드'.(개인적으로 연아 커피라고 불리는 화이트 골드는 너무 달아 못 먹는다.) 익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중독이라도 되어 버린 것인지 일하다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졸릴 때는 특히 믹스 커피가 당겼다. 감정 노동에 지친 날도, 의도치 않은 일을 받아 야근을 해야 할 때도 꼭 믹스커피 한두 잔을 옆에 놓고 살았다. 노란 봉투를 뜯어 종이컵에 부을 때 촤르르- 하고 떨어지는 소리뿐 아니라 거기에 팔팔 끓인 물을 붓고 휘휘 저으면 사무실 곳곳에 풍기는 달큰 쌉싸름한 냄새가 참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 믹스커피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싫어지는데 이유가 있을까마는 굳이 꼽자면, 녀석을 좋아했던 이유가 고스란히 싫어진 이유가 되어버렸다고 봐야 맞다. 먹을 수 있는 커피 중에 가장 구하기 쉽고 값싸며 각성 효과도 뚜렷해서 좋아했던 것이 었는데 이제는 그 점 때문에 먹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고시 공부할 때 잠을 쫓기 위해서, 사회 초년생 시절 미숙한 일처리로 받은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해서, 육아 초기 짧은 시간에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너무 많이 먹다 보니 어느 순간 그 냄새만 맡아도 지겨워졌다. 심지어 위가 자주 아프니 믹스커피 한 모금만 마셔도 속에서 반응이 왔다. 먹지 마, 먹으면 너 아프다? 그 소리를 무시하고 몇 번 들이켰다가 호되게 고생하고는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게 됐다. (그러면서도 다른 커피들을 끊지 않고 먹고 또 먹어 수시로 아프고 말았지만)
아주 사소한 음식이라도 접할 때의 감정과 경험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밥을 보면 소풍날이 생각나며 괜스레 추억에 젖고, 떡볶이를 보면 학창 시절 학교 앞에서 함께 먹던 친구들과의 실없는 대화가 떠오르며 미소 짓게 되는 것처럼 음식에 대한 경험은 꽤 중요하다. 애석하게도 내게 믹스커피는 저녁이 '없는' 삶을 만들게 하는 대표주자였고, 새벽 3시에 일어나 못다 한 일을 꾸역꾸역 하게 하는 주범이었다. 그 녀석만 보면 야근이 생각나고 해야 할 일이 생각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돈 아낀다는 이유로, 간편하다는 이유로 꾸준히 먹다 보니 결국 질린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새삼 다르다. 원래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믹스커피가 갑자기 당긴다. 오랜만에 출근한 회사, 그리고 고요한 이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건 스타벅스 커피 원두향보다는 믹스커피의 그 찐-한 향인 것만 같다. 세월이 빠르게 흐르는 동안 마냥 당하지 않는 내가 되었고, 할 말은 하는 내가 되었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더니 마음이 조금 단단해졌나 보다. 바쁘고 힘든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단단해진 마음은 오랜만에 '그 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촤르륵, 쏟아지는 소리도, 커피 포트에 물이 보글보글, 부글부글, 우괄괄괄 끓는 소리까지.
어쩌면 믹스커피를 싫어했던 것은 그 커피 자체보다는 감당 안 될 일을 벌이고 힘들어했던,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한 번을 못하면서 속으로는 끙끙 앓아 마음의 병이 생긴, 엄마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덜컥 신생아를 키우게 된 그 시절 밤새 울던 내가 미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때 내 마음을 좀 더 잘 들여다보았다면, 삶과 일의 균형을 잘 맞출 줄 알았다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러면 뭘 먹든지, 뭘 하든지 간에 조금은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먹은 지 꽤 된, 노란 커피 한 봉을 꺼내 종이컵에 담는다. 뜨거운 물을 담고 휘휘 저어 준다. 알갱이가 고르게 잘 녹을 수 있도록.
마침 컴퓨터는 부팅을 완료했고 모니터엔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시간이 떠 있다. 8시 10분. 아직 충분하다.
책상에 커피 한 잔을 올려놓으며 생각한다. 그때도 이런 여유를 부릴 줄 알았어야 했다고.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니 따뜻한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며 얼어붙은 손 끝이 녹는다.
아, 믹스커피도 따뜻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