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만난 사이(2)

어쩌다 보니 책 한 권

by 안녕

돈, 돈, 돈!

돈을 마련해야 했다.


몇 년 전 예산을 받아 사업을 하다 심하게 데인 후에 따로 받아 운영하는 사업이 전무했던 탓에 수중에 1원도 없는 상황에서 일단 저지르고 만 '출판'을 어떻게든 실현해 내야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애들 앞에서 호기롭게 저지른 후에 수습하기가 귀찮고 싫은 마음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사실, 그다음 시간에 슬쩍 "얘들아 미안한데, 예산이 없대. 사비로 출판하기엔 너무 부담이라 못하겠다. 우리 다음 기회에 해볼까?"라고 얼버무리고 싶은 마음도 1g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아이들이 너무 진지했고, 너무나 좋아했다. '출판'이라는 말 한마디에 반짝이던 눈빛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게으른 마음을 집어던지고 출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꽉 막혀 있던 '출판 계획'이 순조롭게 풀리기 시작한 것은 '돈', 즉 '예산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부터다. 수소문 끝에 자유학기제 예산을 사용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 1학년 부장님에게 제안받은 금액은 책을 출판할 수 있는 비용으론 충분했다. 게다가 다행히도 부장님이 예산 사용을 흔쾌히 동의해주어 계획에도 없던 '출판 프로젝트' 관련 일처리가 쉬워졌다. 계획되지 않은 일은 수월하게 풀리지 못할 것이라 믿으며 살았는데 의외로 인생은 다양한 변수가 썩 괜찮은 방향으로 해결되며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매 순간 했다.


그다음은 '출판 사이트'를 찾는 일이었다. 학습지 수준이 아니라 서점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책을 만들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어쩌면 이 아이들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으므로 퀄리티도 포기할 수 없었다. 몇 번의 검색만 해도 관련 글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책을 잘 읽지 않는 나라에서 책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은 넘쳐났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의 욕망을 건드리며 돈을 주면 무조건 책을 만들어준다는 곳도 있었다. 자칫하면 유혹에 빠져 섣부른 판단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제한된 예산으로 번드르르한 책을 만들고 싶은 욕망과 현실적인 조건(금액, 서비스, 교열 등)이 모두 충족한 곳은 '부크크'라는 곳. 적당한 퀄리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 후기 등을 훑어보고 마음을 굳혔다. 우리 이야기 창작반 아이들의 책은 이곳에서 만들겠다고. 일이 풀리려고 하니까 순풍에 돛을 단 것 같이 물 흐르듯 흘렀다. 그저 사이트만 훑어본 것인데 괜스레 신이 났다. 책 출판의 'ㅊ'도 시작하지 않았으면서 벌써 책을 출판한 것 같은 기분에 설레 아이들에게도 보여주었다. 온라인 수업할 때 구글 미트 창에 사이트를 공유해주니 아이들은 꽤나 만족스러워했다. 이런 곳이 있었냐면서, 몰랐다면서, 표지도 너무 예쁘다면서.


외적인 준비는 모두 끝. 이제 300페이지를 채울 수 있는 '원고'가 필요했다. 우리 이야기 창작반 아이들은 모두 25명. 모든 아이들이 잘 쓰던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첫 번째 책에는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작품을 받은 후 책에 싣고 싶었다. 완성도와 상관없이 '내가 쓴 글, 내가 끄적인 글'이 종이에 인쇄돼 출판이 되는 경험, 목차에 내가 직접 지은 제목이 소개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아이들을 적절히 독려하거나 혼을 내면서 원고를 쓰게 해야 했다.


일단 욕심을 버렸다. 소설을 창작하는 게 목표라지만 일기 한 장 쓰는 것도 힘든 아이에게 소설은 무리. 그래서 맞춤형 글을 받았다.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은 소설을, 그리고 시나 산문을 쓰고 싶은 사람은 시나 산문을 쓰라고 말해 두었다. 대부분 친구들은 소설을 완성하고자 했지만 5명 정도, 글쓰기를 너무 힘들어하는 남학생들에게는 수업 초기에 썼던 시나, 단어를 활용한 삼행시 등을 적어 내라고 했다. 특히 남학생들 중에서도 운동을 좋아하는 녀석들은 소설보다는 짧은 시에 흥미를 느껴했고 시간을 주면 끙끙대면서도 제 나름의 글을 완성하고 제출해 주곤 했다. 그럼 나는 어떤 평도 하지 않고 무조건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소설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그 글이 부족한 것은 아니니까.


대신, 소설을 선택한 아이들에겐 좀 더 엄격한 잣대를 요구했다. 인물, 사건, 배경, 주제 등은 기본이고 개연성이 없거나 너무 허무맹랑하거나, 혹은 맞춤법과 띄어쓰기 등 기본적인 것들이 부족하면 "이런 건 책으로 내기가 어렵다."라고 말하며 되돌려 보냈다.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생각하며 글을 쓰도록 했다. 몇 번의 수정과 퇴고를 거친 아이들의 글은 희뿌연 안개가 걷히든 점점 제 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포기하는 상황에서 두 명의 남학생이 끝까지 붙잡고 소설을 완성해 왔는데, 유일한 남학생들이어서 그런지 그 작품엔 더 애착이 갔다.


한 달 정도 작업을 하다 보니 얼추 원고의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때, 나를 도와줄 아주 핵심적인! 반드시 꼭 모집해야 하는 '편집부'를 뽑았다. [2020 이야기 창작반 편집부]라는 카톡방을 만들어 6명의 자발적 편집부원과 끊임없이 소통했다. 부크크라는 출판 사이트에서 요구하는 폰트와 원고 형식이 있기에 아이들에게 받은 1차 원고를 편집부원들에게 3~4개씩 나누어 주고 마감 기한에 맞춰 편집을 하라고 일러두었다. 아이들은 이미 한글 프로그램이나 워드 프로그램이 익숙한 똑똑이였기에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힘'이 있었다. 각자 맡은 분량의 글을 읽고 띄어쓰기, 맞춤법, 오타 등을 교정해 주었고, 줄 간격과 문단 등을 수정해 주었다. 그러면 나는 그 원고를 받아 최종적으로 목차를 정하고 읽기 편할 수 있게끔 문단을 배치해 주었다. 적어도 "사랑했다."라는 단어가 '사랑했'과 '다'로 끊어져 각기 다른 페이지에 인쇄되지 않도록.


낮엔 수업을 하고 퇴근 후 아이를 돌본 후, 밤새서 편집을 하면서도 편집부 이외의 아이들에게는 꾸준히 편집 과정을 보여주었다. 코로나19 백신이 나오기도 전인 시기라 주로 원격수업을 했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에게 표지를 고르게 하거나, 글이 이렇게 편집되고 있다는 소식을 간간이 전해 주었다. 많은 아이들은 'ㅋㅋㅋㅋㅋㅋ'라든가 '오오!', '대박'과 같은 제 나름대로의 표현을 활용해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때마다, 그저 흥에 도취되어 그르치지 않게 계속 미션을 주었다. '소설을 쓰고 난 후의 후기를 적어라, 독자에게 바라는 점을 적어라'와 같은 과제를 클래스룸에 올려주면 아이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제 생각을 덧붙여 제출했다. 그러면 나는 모두 잠든 새벽에 일어나 또 힘을 내서 커피를 진하게 내린 후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한 요새 아이들이 훗날 도서관에 비치될 자신의 책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경험은 주고 싶지 않아 '필명'을 받았다. 중1 감수성, 소위 말하는 오글거림이 부끄러워 그 책을 라면 받침으로 쓰거나 숨기는 게 급급하게 될까 봐, 그리고 나름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시작한 필명 작업이었는데 아이들은 생각보다 좋아했다. 실제 친한 친구들의 이름을 따서 '한시연'이라고 만들거나, 어릴 적엔 예쁘고 아름다운 공주가 되고 싶었지만 이젠 누군가를 다스리고 싶다는 이유로 '여왕'이라고 만들거나, 아니면 자신의 별명이나 좋아하는 숫자, 혹은 자신만의 의미를 담은 한자를 조합하여 '백단월(白端月:하얗고 단조로운 달)'과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멋진 필명을 만들어냈다.


또, 작품에 대한 후기를 직접 써보게 했다. 개인적으로 작품이 완결되고 나서 후기 보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그 글을 보다 보면 작품 속 인물이나 상황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됐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미처 작품에 담지 못한 의도를 '후기'에 담아내도록 했다. 소설을 쓰면서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기억에 남는 점과 같은 자신의 느낌이나 글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감정, 교훈, 생각)등을 직접 적어보게끔 했다. 아직은 소설을 치밀하게 구성하기 어려운 아이들이 어찌어찌 완성한 소설. 어쩐지 자신이 보기에도 부끄러우면서도 뿌듯하면서도 묘한 감정이 드는 소설을 마무리하며 제 생각을 글로 표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말하고자 하는 바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보이지 않는, 하지만 언젠가 읽어 줄 독자와 긴밀히 소통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떨 땐 1시까지 안 자고 지친 몸 이끌며 열심히 적었던 절대 안 끝날 것 같은 이 '그때 그것'이 정말 끝났다니 되게 믿기지 않는 것 같아요. 덕분에 밤낮없이 마감에 휩쓸리시는 다른 작가님들의 고충도 성실하게 느껴봤고, 요즘 아이디어가 안 나서 열심히 공들인 작품 끝이 애매한 것 같아 매우 아쉬운 것 같지만 좋은 추억이 되었다 생각해요. 출판이란 목표가 뚜렷하다 보니 지금까지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쓰지 않았던 글을 이렇게 쓸 수 있어 오랜만에 즐거웠던 것 같아요. 이 글이 무료한 일상에 조금 흥미가 된 것 같아 행복해요. 이 글을 읽고 많은 피드백과 칭찬을 해줘 더더욱 멋진 글을 쓰며 발전할 수 있던 계기가 된 것 같아 친구들에게, 선생님께 감사해요 : - )
저는 『F.yesterday』를 쓰며 각 인물들의 감정선에 가장 주의를 기울이기를 원했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만큼, 서로를 만나 각자의 아픔을 조금씩 지워나가는 어쩌면 성장물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감정선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점을 글에 자연스레 녹여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크네요.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예현'은 세 명의 주요 인물 중 가장 단단하지만 어쩌면 약한 인물입니다. 언니의 기일만 되면 힘들어했던 것처럼요. 그리고 '도희'는 차갑고 쌀쌀맞은 아이처럼 보이지만 그저 다가갈 줄을 몰랐던 아이였으며, 마지막으로 '서연'은 무관심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현은 비, 도희는 별, 서연은 눈에 얽힌 슬픈 사연들이 있길 바랐고, 결국에는 그 사연들을 행복해지도록 바꿔나가고 싶었습니다. 아마 도희와 서연이 친해졌던 계기, 좋아하는 영화가 같을 때에도 도희는 별이 빛나는 장면을, 서연은 주인공이 눈을 사박사박 걷는 장면을 떠올린 것처럼요. 이와 같이 세 명의 등장인물은 각자의 아픔을 전부 승화시킬 순 없었겠지만, 서로로 인하여 그 슬픔을 조금이라도 행복으로 바꿔주기를 바랐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무엇인가가 느껴졌다면 좋겠네요. 그럼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25명의 원고와, 25개의 후기가 모였다. 편집부 6명의 영혼이 탈탈 털리는 편집 작업, 그리고 담당교사 1명의 땀과 눈물과 애정이, 분노와 자책으로 넘어가기 직전. 드디어 탈고하고 책을 주문할 수 있었다. 기다림은 지루하리만치 길고, 스쳐 지나가듯 짧았다. 며칠 후, '배송이 완료되었습니다'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행정실 앞으로 내려갔다. 묵직한 두 개의 택배 박스 안엔 40권의 새 책이 수줍게 담겨 있었다.




2020년 11월. 우리의 첫 번째 책, <기억하다, 쓰다>가 세상에 나온 순간이었다.

430페이지에 우리의 2020년이 담겨 있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겨 보던 우리는 마스크 속에서 보이지 않는 미소를 마음껏 흘리는 중이었다.





첫 번째 책입니다. 판매를 하지 않았지만 소장용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었어요.


총 20화로 구성했고요. 18화까지는 소설, 19, 20화는 시와 다른 글을 모았습니다.


열네 살의 글솜씨는 꽤나 괜찮았고 주제의식도 뚜렷했습니다. 매 순간 배웠습니다. :-)


Photo by Fang-Wei Li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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