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아기 낳으면 이 책 다 버려야 할 걸?”
출산 100일 전, 신혼집에 방문한 친구의 첫마디였다. 처음엔 그 말을 웃어넘겼지만 임신 막바지가 다 될수록 마음이 바빠졌다.
‘아기가 기다가 저 책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쩌지?’
‘이 책들을 중고로 팔까? 그 돈으로 우리 아기 분유 한 통 더 사줄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자 내가 남편을 꼬시기 시작했다.
“우리 진짜 안 읽는 책은 팔자. 어차피 도서관에서 빌려도 되잖아.”
몇 번을 망설이던 남편은 내 요구를 승낙했다. 곧 출산이 다가온 부인의 말을 거부할 그럴듯한 이유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3년 전인, 18년 여름. 만삭인 나는 대학시절부터 모아 온 책을 하나씩 골라 묶음으로 팔기 시작했다. 부른 배를 쥐어 잡고 한 권 한 권, 정리했다. 내가 아끼는 책들, 수험서, 그리고 좋은 에세이를 제외하고 전부 처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중고거래가 그렇듯 내가 팔 책의 목록들은 제 값을 받지 못했다. 상태 좋은 새 책들이 ‘1,000원 균일가’로 가격이 찍힐 때면 ‘내가 이 책을 얼마 주고 샀는데!’하는 본전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정리하기로 했다. 나와 다르게 남편은 팔 책을 정하는 것부터 어려워했다.
“이 책은 진짜 좋은 책이야. 구하기 힘든데.”
“이 책은 중고 서점에서 반값도 더 할인해서 산 책인데? 이걸 꼭 버려야 할까?”
하지만 나의 단호한 태도에 못 이겨 책을 추려냈다. 그런 책들이 모이고 모여 대략 4박스가 되었다. 중고 서점 사이트에 조회해보니 우리 책을 다 팔면 40만 원가량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순간, 너무 헐값에 파는 것 아닌가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을 굳혔다. 계속 짐짝처럼 쌓여 있는 책에 부딪혀 아기가 ‘다치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4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알라딘-‘
처분한 지 일주일 뒤, 은행에서 알림이 왔다. 책을 판 대가로 받은 돈 40여만 원이 찍힌 메시지.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혹시나 허튼데 돈을 쓸까 봐 냉큼 태어날 아기를 위한 적금 통장으로 이체했다. 내 새끼처럼 아끼던 책들이라 아쉬울 거라 생각했지만 돈이 들어오니 내가 보낸 책들과 시원섭섭한 감정은 금세 기억에서 잊혔다. 돈이 두둑하게 쌓이자 괜히 신이 났다. 한 번 돈의 맛을 본 나는 또다시 돈을 벌기 위해 한동안 책장을 뒤적이곤 했다.
무엇이든지 가지고 있어야 영원히 남을 것 같다고 생각한 나다. 일기장, 사진첩, 손편지는 늘 상자에 넣어 보관했고 특히나 책은 꼭 직접 구매해서 서재에 꽂아두며 흐뭇해했다. 하지만 한 번 상자나 책장에 갇힌 물건들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추억’이란 이름으로 묶여 내 ‘배경’이 되어주었지만 영감을 주는 ‘현재’는 되지 못했다.
그렇다. 좋은 구절은 기록해 두면 그만이고, 책이 보고 싶다면 다시 빌리고, 손편지나 일기장, 사진첩이 혹여나 사라진다 해도 마음속에 남은 감정은 영원하다. 이 모든 것을 꼭 지녀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책에 대한, 추억에 대한 나의 집착일지도 모른다. 어느 책에서 본 구절처럼
‘내가 어떤 책을 읽고 감동과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 자체로 값을 다 해낸 것이 아닐까?’
‘그 책이 중고서점이나 헌책방에서 누군가에게 선택되고 다시 그 값을 해낸다면 그 자체가 훨씬 더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비우니 채울 곳이 생겼고, 가득 차면 오히려 버리고 싶어 졌다.
물론, 이 생각은 3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한 권을 채우면 안 읽는 것들, 안 보는 것들은 버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큰 책장, 큰 수납장은 필요 없다. 지금 있는 것들로도 충분하다. 그러다 보니 책을 구매할 때도 좀 더 신중해진다. 대신 도서관을 더 자주 이용하게 된다.
인터넷 서점에서 주는 굿즈를 받기 위해 무작정 이벤트 도서를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볼만한 책, 내 취향에 맞는 책, 그리고 가치가 있는 책을 고르기 위해 더 신중해진다. 대신 만족도가 올라간다. 한 권을 읽어도 제대로 읽게 된다. 의미 없이 책장만 가득 채우고 책을 읽었다는 '느낌'에 취하지 않는다. 정돈된 책장을 보면 머리도 맑아진다. 비움이 주는 만족감이다. ‘채워’야, ‘가져’야, ‘쥐고 있어’야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 새삼 와 닿는다. 모든 게 넘쳐나는 세상이다. 적어도 내 삶만큼은 원하는 대로 채울 수 있는 삶이, 진짜 내 삶이 아닐까.
추신 : 27개월 딸을 키우는 요즘. 우리 집 책장엔 그림책이 가득하고, 거실엔 알록달록한 뽀로로 피규어&인형이, 레고와 갖가지 장난감이 즐비하다. 건들기만 해도 울어버리는 딸... 딸~ 우리 대화 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