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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4년 차, 계산적인 인간관계에 질려버린 적이 있다. 진심으로 대해도 돌아오는 것은 유난이라는 반응뿐이라 마음이 지쳐가고 있었다. 밤 11시가 넘어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는 고독한 자취생활은 그런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마음에 큰 구멍 하나 뚫린 채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던 내게 우연히 시작한 손그림, 손글씨는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작은 종이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펜으로 선을 땄다. 좋아하는 컵, 스마트폰, 연필, 꽃 따위를 그렸다. 색칠까지 다 한 후 완성된 그림을 보면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던 복잡한 직장 일 따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한 번은 '일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며 살까?'라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그만큼 그림 그리기는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하루 중, 유일하게 내가 원하는 대로 완성할 수 있는 작은 세상이 열렸던 것이다.
그 후부터 지긋지긋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을 때, 머릿속에 불안한 생각들이 가득 차 괴롭힐 때, 때로는 혼자 있고 싶을 때에는 어김없이 종이 한 장과 연필을 꺼냈다. 약간은 누릿한 종이 한 번 문지르면 마음이 편해졌고, 뾰족이 깎은 연필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나는 사각사각 소리는 "괜찮아."라며 말을 걸어주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무작정 그리고 나면 요동치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임신 후 갑작스러운 호르몬 변화로 매일 짜증이 날 때도 나를 도왔던 것은 한 장의 종이와 연필이었다.
그래서 난 딸이 태어나면 꼭 같이 그림 그리고 싶었다. 커다란 스케치북을 사서 알록달록 색연필로 같이 그림을 그리는 것, 벽지에 큰 전지를 붙여놓고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껏 그리는 것은 나의 로망이 되었다.
벼르고 벼르던 내게 드디어 때가 찾아왔다. 아기가 돌이 지난 것이다.(육아의 큰 전환점은 바로 돌인데 신생아였던 꼬물꼬물 아기는 돌이 지나면서 먹는 것도 노는 것도 완전히 바뀌게 된다.) 냉큼 아기 색연필을 구매했다. 가장 싸면서도 색감이 선명한 것으로.
택배가 오자마자 딸한테 색연필을 보여 주었다. 딸은 처음 보는 알록달록한 색이 신기한지 한참을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며 놀았다.
“자~ 엄마가 한 번 그려볼게~”
하며 종이에 쭈욱- 선을 그렸다. 하얀 종이에 빨간색 선이 그어지자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다음은 파란색으로 동그라미를 크게 그려주었다. “이게 동그라미야. 봐봐. 신기하지? 한 번 해볼래?” 딸에게 색연필을 쥐어주자, 조심스럽게 그림(이라 쓰고, 낙서라고 읽는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날, 자기 뜻대로 움직이면 생겨나는 그림을 보며 초롱초롱 빛났던 딸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후로 우리 딸은 매일 같이 스케치북에 나름대로 조그만 선, 동그라미 따위를 그리기 시작했다. 빨간색, 파란색, 까만색 등 다양한 색연필을 쥐고 조금만 힘을 주면 뭔가 생겨나는 게 신기했던 것 같다. 쟁여둔 스케치북은 금세 동났고, 뾰족했던 색연필도 뭉툭해졌다. 칠하고 칠해서 더 이상 자리가 없는 스케치북을 버리는 날 보던 남편은 말없이 스케치북 열 권을 추가로 주문해주었다.
“엄마! 엄맘마!”
내 다리를 흔들면서 보여준 것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이었다. 사실은 그림이 아니라 낙서에 불과했지만. 이게 뭐냐 묻자, ‘엄마! 엄마!’라며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낸다. 대충 해석하자면 ‘엄마를 위한 그림’이란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그냥 기특해서 웃어 주고 안아 줬다. "우리 딸~~ 잘했어!" 말은 덤으로 얹어주면서.
칭찬에 텐션이 올라간 딸은 온 집안을 누비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스케치북, 종이, 책, 할 것 없이 주욱 주욱 선을 긋고, 색칠을 했다. 한 번은 내가 집안일하는 사이에 몰래 하얀 벽지에 빨간 색연필로 주우우우욱- 아름다운 직선을 그려 놓은 것을 발견했을 때는 솔직히 아~~~~ 주 조금 많이 짜증도 났다. 벽지에 그린 낙서를 아기와 함께 지우개로 박박 지우면서 그림은 ‘종이’에만 그리는 거라고 수차례 설명해주었다. 물론 딸은 실망한 듯한 눈치였지만. (딸~ 여기 우리 집 아니야……)
나는 우리 딸의 그림이 좋다. 삐뚤빼뚤, 서툴지만 나름 노력해서 완성한 그림이 좋다. 종이에 색연필로 쓱쓱- 영수증에 볼펜으로 쭉쭉- 그어댄 것들이 참 정겹다. 나 어렸을 적, 500원짜리 스케치북 하나 문방구에서 사 와서 공주랑 왕자를 그리고 엄마한테 자랑하던 때가 떠올라서 뭉클해진다.
난 우리 딸이 거칠거칠한 종이의 질감을 오래도록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날카로운 연필이 종이에 닿을 때의 사각거림을, 어느새 뭉툭해진 색연필이 부드럽게 그어지는 촉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문방구에서 직접 좋아하는 스케치북을 고르고, 좋아하는 것을 그리면서 느끼는 행복한 감정을 되도록 오래오래 경험했으면 한다. 그림 속에 종이 특유의 냄새, 연필의 나무 향도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시간도 보냈으면 한다.
그래서 나중에 삶에 지친 어른이 되었을 때, 위로해줄 누군가가 없을 때, 어린 시절 엄마랑 아빠랑 손으로 그림을 그렸던 순간을 떠올리며 조금이나마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어느 날, 빨래를 개고 있는 내 옆에 앉은 딸은 말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난히 짜증을 많이 부리던 날이었는데 좋아하는 빨간색 하나 꺼내 들고 격렬한 손짓으로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닥치는 대로 색을 골라 칠하는 모습을 보니 자취방에서 혼자 무작정 그림 그리던 옛날의 내가 떠오른다.
'저도 하루 종일 스트레스받았겠지. 코로나로 나가지도 못하고 매일 집에만 있는 게 어른도 힘든데 아이는 오죽하겠어. 그려~ 너도 그림 그리면서 풀어라. 이것저것 색칠하고 쭉쭉 그리면서 풀어.'
라며 그냥 둔다.
한참을 그리던 딸은 나를 부른다.
난, 엉덩이 토닥토닥해주며 말없이 안아주었다.
'딸~ 스트레스 많이 풀었어~?'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