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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과 함께 춤을

by 안녕

'독서'라고 쓰고 사실상 대부분의 아이들이 잠드는(?) 수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치밀한 작전이 필요하다. 교사되고 5년 정도는 독서 수업을 엄두도 못 냈다. 왜냐, 여기서의 '독서 수업'은 교과서 지문 읽기 수준에서 더 나아가 수업 시간 1시간은 온전히 할애하여 한 권의 책을 읽는 수업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없었다. 좋은 책을 고르기도 어려웠거니와 45분 동안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다 생각했다. 독서란 게 그렇지 않은가.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 간간이 흘러나오는 음악. 그리고 천천히 문장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메모하는 아이들. 뭐 그런 모습을 그리는 내게 현장의 독서수업은 지옥이었다.


(수업 종이 친다. 아이들 모두 웅성대며 떠들거나 돌아다니고 있다.)


"야. 오늘 국어 뭐임?"

"독서."

"아. 진짜 완전 개 싫어."

"책 있냐?"

"없는데?"

"어쩔"

"몰라 어떻게 되겠지."


(나는 교실로 들어가 짐짓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는다. 수행평가 어쩌고, 책의 중요성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 준비물 없는 사람들 뒤로 가라 어쩌고, 너희들은 학교에 책을 안 가져오면 군인이 전쟁터에 총 안 들고 가는 거야 저쩌고....)


순간 졸아붙은 척 연기를 하며 아이들은 책상 위에 책을 한 권씩 꺼내 펼쳐 읽는다. 학습지를 달라고 하는 아이, 책이 없다고 끝끝내 우기는 아이, 물 먹으러 갔다 오겠다는 아이, 갑자기 배가 아파 보건실을 가겠다는 아이를 처리(?)하고 겨우 분위기를 잡은 지 5분...?


저들끼리 키득키득거리다가 결국 걸리고, 나는 참다못해 소리를 지른다!


"야!!! 조용히들 안 해!!!?"



아수라장을 겪는 게 두려웠다. 독서 시간이 떠드는 시간이 되는 것도, 독서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그 시간을 끔찍하게 괴로워하는 것도,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이 그 시간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올해 5월도 사실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아이들은 책을 읽는다, 수행평가에 들어간다라는 말만 시작해도 벌써부터 싫은 티를 팍팍 냈으며 몇몇 아이들은 내 설명을 듣다가 그냥 아예 엎어지기까지 했다. (믿기 어렵지만 활발하고 에너지 넘치는 중1의 이야기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교육과정이 그러하니, 평가가 이러하니 밀고 나갈 수밖에.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조용히 안 해? 조용히 좀 하자, 다른 친구들 방해하지 마, 점수 깎는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애써 독서 분위기를 잡아 나가던 어느 날. 문득, 눈에 포스트잇 한 장이 들어왔다.


태도가 너무 산만하여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아이가 계속 맘에 걸렸는데 말로는 못할 이야기를 글로 써보면 어떨까 싶었다. 너 좀 조용히 해,라는 말속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


[00아. 독서 시간 힘들지. 그래도 조금만 집중해 보자. 파이팅!]


교실을 순회하는 척하며 녀석이 읽고 있는 책장 위에 슬며시 포스트잇을 붙이곤 돌아갔다. 녀석의 눈빛이 살짝 변하고 자세를 가다듬는 게 보였다. 혹시나 싶어 다른 아이들 몇몇에게도 포스트잇에 메시지를 적어 붙여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 포스트잇을 받은 아이들이 조금씩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5분 떠들 것을 3분만 떠들고, 10번 딴짓할 것을 5번 딴짓하더니, 급기야 독서 수업 초 절정기에는 모두가 조용히 책에만 고개를 파묻고 읽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특정 반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5개 반 100명의 아이들 모두, 조용히 해라는 말 보다도 '힘내'라는 말에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 모습에 신이 나서 매 수업 시간마다 20명의 학생들에게 하나하나 포스트잇 편지를 적어 건넸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독서 수업이 기다려졌다. 오늘은 녀석들이 얼마나 열심히 읽어줄까,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까, 하며 수업에 들어가 분위기를 조성해 주고, 편지를 적어 주었다.


[OO아. 너는 국어 시간에 진짜 집중 잘해주더라. 그 에너지로 독서도 파이팅!]

[벌써 다 읽은 거야? 독해력이 뛰어나네? 너희 반에서 제일 빨리 읽는 것 같아.]

[네가 이렇게 책을 열심히 읽어주니 쌤도 너무너무 감동이야. 고마워.]

[이제 그 부분만 읽으면 완독이네. 미리 축하해.♥]


일주일에 19시간, 19번의 만남, 그리고 매시간 20장씩 포스트잇을 건네니 어떤 아이들은 독서 수업이 끝날 즈음에 5장까지 포스트잇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 그런 아이들을 부러워하며, 다른 아이들도 더 열심히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나 또한 의미 있었다.

조용히 하라는 말의 의도는 사실 열심히 책을 읽었으면 하는 것이다.

열심히 책을 읽었으면 하는 이유는 그 책이 네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선 '말'보다는 '글'이 옳았다.

시끄러움을 누르기 위해 더 큰 목소리로 질러대는 교사의 외침은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네가 정말 집중해서 책을 끝까지 읽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는 글은 아이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편지를 주고받지 않는 세상에 손글씨로 쓴 포스트잇 한 장이 마음을 울린 것이다.


울림은 행동으로 이어져 독서 시간이 노는 시간이 아니라 정말 '책을 읽는 시간'으로 바뀌게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또, 아이들마다 각기 다른 손 편지를 실시간으로 써주기 위해선 아이들을 깊이 있게 관찰해야 했다. 아이들의 읽기 태도, 습관, 그리고 자세까지도 섬세하게 관찰하고 성의껏 적어주려고 노력했다. 그 흔한 시 구절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말이 200% 공감될 정도였다. 자세히 볼 수록, 오래 볼수록 녀석들이 나름대로 애를 쓰고자 하는 마음이 보였다.


마음과 마음이 통한 순간이었다.





독서수업을 하며

배운 것이 많다.

수백 장의 포스트잇에 글을 썼고

그 포스트잇은 학습지, 책을 넘나들며 춤을 추었다.


천둥벌거숭이인 나의 1학년들은 책장을 넘기며, 생각을 채우며 그렇게 성장했다.

나도, 입을 다물고 소리를 멈추고 글을 썼다.

그리고 못할 것이라는, 망할 것이라는 징크스를 깨고

나도, 함께 성장했다.







수업이 끝날 무렵 한 학생에게서 포스트잇 편지를 받았다.


[선생님. 항상 힘들지, 라며 마음을 물어봐주셔서 감사했어요. 언제나 선생님께서 좋은 수업 해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도 수업하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5월, 따스한 봄볕을 느끼며

포스트잇과 함께 춤을 추었다.


틀림없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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