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1개가 다섯 명의 아이들을 먹여 살린다.
수업하면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이 무엇이냐.
바로
"나, 지우개 좀."
이다.
아주 작은 지우개 하나가 주변 아이 5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지나치지 않다.
실제로 그렇다.
지금 이 글을 보는, 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님이 계신다면 당장 아이의 필통을 열어 보시라. 지우개가 있다면, 당신의 자녀는 정말 반에서 대단한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아이가 결석을 하는 날, 녀석의 짝꿍과 그 뒷자리 두 명과, 그 앞자리 두 명은 필기를 하다 틀려도 고칠 수 없다. 왜? 지우개가 없어서.
나의 사랑스러운 질풍노도의 고객님들은 '지우개' 따위는 절대 키우지 않기로 약속을 한 것 같다. 분명 학기 초에는 아주 예쁘고 사랑스러운 지우개를 샀을 텐데 어느새 사라져 필통에서 자취를 감춘다. 사이즈도 작고 잘 튕겨서 잃어버리기 쉬운 것까지는 이해한다. 아니, 그러면 다시 사야 하는 것 아닌가? 수학 문제 풀 때, 수행평가 볼 때 없으면 불편하지 않나?
한 번은 진지하게 물어봤다.
"너네 공부할 때 지우개 없으면 불편하지 않아?"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
"아, 쌤. 저 볼펜으로 푸는데여?"
"(세상 진지한 얼굴로) 쌤. 전 공부를 안 합니다."
그래서일까. 수업 중에 그렇게 지우개를 빌린다. 야, 나 좀. 나도. 나도 나도! 하는 소리가 웅성웅성 울려 퍼지면 처음엔 참다가 나중에 화를 버럭! 낼 수밖에 없다.
한 번은 수행평가를 보는데 자꾸 어떤 애가 뒷자리에 있는 친구 책상 위로 손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너 부정행위하는 거냐고, 한 소리 하려고 갔더니 아뿔싸. 지우개를 빌리려던 거였다. 휴- 다행이다 싶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순간 뭐가 다행인가 싶었다. 어쨌든 걔는 한 시간 내내 지우개를 빌릴 텐데?
앞뒤로 빌리면 그나마 양반. 결코 빌릴 수 없는 위치에서 빌리는 경우도 있다. 대각선 끝에서 끝까지 전달하려고 별의별 방법을 다 쓴다. 손으로 전달하면 낫지, 위로 던지다가 누구 얼굴에 맞으면 그때부터 수업은 끝- 싸움 말리느라 시간 다 간다.
그러다 순간 울컥해서
"야! 이것들아! 지우개 좀 사라고!!!!!!"
한 소리 하면 또 돌아오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한다.
"아. 쌤, 어제 샀는데 잃어버렸어여."
혹은
"괜찮아여."
진짜 샀는지 안 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뭐가 괜찮다는 건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중요한 건 지우개는 그런 존재라는 것. 없으면 되게 불편하고, 막상 사면 다시 또 잃어버리는.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그냥 한 두 번 빌리다 마는. 연필처럼 없으면 아예 아무것도 못하는 것은 아니라서 자꾸 깜빡깜빡하게 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그래서 난 필통에 지우개를 갖고 다니는 애들을 보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너는 따뜻한 인류애를 가졌구나,
너는 주변 친구들을 도와주는 아이로구나,
너는 참, 준비성이 철저하구나,
너는 참, 수많은 아이들의 손을 거치고 거쳐 사라질법한 지우개를 용케도 잘 지켜냈구나,
넌 진짜 뭘 해도 하겠다.
라는 생각을 혼자서 한다. 물론 말로는 표현 못하고.
그러니 다시 한번
내 자녀의 필통 속에 지우개가 있다면 무조건 꼭 안아주시라.
우리 딸, 우리 아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꼭. 알아주시고
칭찬해 주시길.
녀석은 분명 뭘 해도 할 대단한 녀석임에 틀림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