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 한 장 손에 들고

스물한 살, 거액의 돈을 받다

by 안녕

집안 사정 때문에 갑자기 휴학을 했을 때 어느 영화관 매점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1년 전만 해도 캠퍼스를 누비던 내가 허름한 영화관에서 팝콘을 튀기고, 오징어를 팔아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쩌다 친구들을 매점에서 만나면 부끄럽고 자존심도 상했다. 하지만 당장 돈이 급했던 나는 ‘한 학기 등록금만 모으면 그만둔다.’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말을 시켜도 ‘네.’, ‘아니오.’라며 철벽을 치는 내게 꾸준히 말을 걸어준 언니가 있었다. 스물아홉의 언니는 내가 어떤 반응을 하더라도 말을 걸었다. “뭐해~? 책 읽어?”, “야~ 멋지다. 나는 그런 거 읽어 본 적 없는데.”라는 말을 하며 곁을 맴돌았다. 가끔 툭툭 내뱉는 내 말에 귀 기울이며 “괜찮아. 아직 어리잖아.”와 같은 말을 건넸고, 덕분에 내 맘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하는 언니들과 거나하게 술을 마신 적이 있다. 평소와 달리 많이 마셔 취해버렸다. 당시 우리 집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힘들어졌다. ‘과연 내년에는 복학할 수 있을까?’, ‘차라리 자퇴를 해서 돈을 버는 게 낫지 않을까?’, 따위의 생각이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때다. 그야말로 인생의 암흑기.


술김에 속 얘기도 하고 위로받고 싶었는데 용기가 없었다. 망설이다 보니 어느새 막차 시간. 그때였다. 같이 버스를 기다려주는 언니 앞에서 갑자기 울먹이며 “나 사실 되게 힘들어요.”라는 말을 뱉었던 것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는 것에 없어 지쳤다고 끅끅 거렸던 것 같다. 언니는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아니, 언니는 울면서 기다려주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막차가 도착했다. 황급히 버스에 타려고 하는 나를 붙잡은 언니는 지갑에서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꺼내 주었다. “이거 얼마 안 되는 돈인데… 너한테 주고 싶어. 내 맘이 그래.”


갑작스럽게 받은 돈을 거절할 틈도 없이 버스는 출발했다. 다음날 다시 돌려주려고 했지만 언니가 받지 않았다. 언니는 그날 못한 말을 내게 덧붙여 말했다. “정말 힘들 때, 그 돈 써. 그러면 내 마음이 좋을 것 같아.”라고. 어떤 사심도 없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전해준 언니의 10만 원은 내게 100만 원, 아니 1,000만 원보다도 더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마음이 나를 움직였다.


당시 난 주변 친구들을 보며 ‘넌 좋은 환경에서 여유롭게 커서 이런 건 모르지?’, ‘나도 너처럼 살았으면 훨씬 더 잘했을 수 있어.’란 생각만 했다. ‘어차피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게 인생이야. 주변 사람들한테 정을 줘봤자 다 배신만 할 거야.’라며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친구들 앞에서는 밝고 당당한 척했지만 속으론 늘 삶을 비관하며 우울해했다.


그런데 친해진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언니가, 그저 술주정일 수도 있는 내 이야기를 듣고 선뜻 10만 원이란 돈을 내게 준 것이다. 순간 깨달았다. 아, 그동안 너무 날이 서 있었구나, 힘든 상황을 누군가에게 들키면 약점을 보이는 거라고 혼자 생각했구나, 세상엔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리고 힘듦을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내 마음이었구나,라고 말이다.


이듬해 나는 다행히 복학을 했고 몇 년 후, 취업에도 성공했다. 월급이 나올 때마다 그 언니가 생각났지만 연락하기가 민망했다. 몇 년을 망설이다 남아있던 연락처를 찾아 용기를 냈다.


[언니!! 우리 한 번 볼까요? 종로 3가 어때요?]

[오! 진짜 오랜만이다. 좋지!]


일사천리였다. 오랫동안 연락이 안 닿았던 사람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빠른 만남이 진행되었다.


"야~ 이제 진짜 어른 다 됐네."

"언니는 똑같아요. 완전 동안!"

"나는 이제 늙었어. 눈가에 주름도 있고."


대화가 무르익었을 무렵 언니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언니가 그때 같이 울면서 준 돈이에요. 꼭 돌려주고 싶었는데 10년이 걸렸네요.”


언니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며, 이런 걸 뭘 돌려주냐며 민망해했고, 나는 더 많이 담지 못해 미안하다고 머쓱해했다. 그러며 우리는 스물아홉 살, 스물한 살 그 시절로 돌아갔다. 그날 우리는 예전 그 버스정류장에서처럼 뭉클했고, 행복했고, 즐거웠다.


언니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가는 길. 잠시 정차한 버스 안에서 그날이 다시 떠올랐다. 야속한 세상에 덤비진 못하고 지질하게 울기만 하던 나를 다독여준 언니가 새삼 고마워진다. 그때의 언니보다 훨씬 나이를 먹은 지금, 나 역시 누군가에게 ‘언니’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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