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봄, 라오스 시판돈
이 날이 오길 얼마나 기다렸던지. 잠을 설쳤음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을 입었다. 전날 목욕재계하고 면도도 한 참이다. 여기 음식은 다른 마을에 비해 맛이 덜해 배가 고픈데도 식욕은 당기지 않았다. 접견 때 원숭이 요리사가 직접 짜낸 생과일주스 정도는 얻어마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공복에 호텔문을 나섰다.
돼지왕을 만나는 날이다.
6시가 갓 넘었는데도 날은 밝았다. 여기저기 방울진 이슬과 서늘한 바람이 해가 이제 막 올랐음을 증명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젖어있었다. 물이 흥건한 논에 흰 오리 몇 마리가 날씨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노닐었다. 메콩강 하류의 섬은 건기의 막바지인데도 물이 풍부했다. 라오스어로 사천 개의 섬을 뜻하는 시판돈은 강물에 실려와 쌓인 토사 위를 모세혈관처럼 흐르는 강이 수많은 갈래로 나눈 섬들의 집합이다. 비가 많이 오는 우기에는 많은 섬들이 물 속에 잠겨 섬의 수가 줄었고, 물이 적은 건기에는 섬이라기에도 뭐한 조그만 흙덩이들이 힘 빠진 물 사이로 굳이 얼굴을 내밀어 섬의 수를 늘렸다. 왕은 웬만한 홍수에도 잠기지 않는 4개의 큰 섬 중 돈뎃(뎃 섬)에 휴양 차 머무르고 있었다.
돼지왕에게 가는 길에는 수많은 물소와 닭, 물새가 지키고 있었다. 물소는 지나는 길 양편의 논에서 날카로운 뿔이 난 험한 얼굴로 검문을 했지만 겁이 많아 가까이 오지는 못했으며 내가 어깨동무에 기념사진이라도 남기려고 다가가면 엄청난 속도로 도망쳤다. 검고 강한 몸과 쇠뿔을 가졌다고 해도 저렇게 겁이 많아서야 개구리도 막지 못할 듯싶다. 닭은 시끄러웠다. 어떤 닭은 단순히 기상시간을 알린답시고 꿱꿱거렸고, 붉은 볏을 계급장으로 단 닭은 여권이니 접견 가능 확인서니 통과문서를 보여달라고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지만, 막상 문서를 보여주면 문서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는 지렁이를 잡아먹기 바빴다.
돈뎃은 큰 섬이 아님에도 논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논 중간마다 가끔 이질적으로 튀어나온 인가는 나무기둥으로 땅에서 1~2미터 높게 지어져 물을 피했다. 집을 지키는 개는 사람이 지나도 짖질 않는다. 섬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메인로는 들쭉날쭉한 흙길로 폭도 좁았다. 길은 사람이 낸 것이되 여전히 자연이었고, 개나 오리떼에게는 길이되 물소 같은 동물들에게는 거추장스럽게 논을 막는 장애물이었다. 길은 그 자체로 살아있어서 중간에 나무가 있으면 빙 둘렀고, 길 양편의 논이 범접하면 제 존재를 숨기고 논둑으로 변하기도 했다. 멀리 강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수다는 길이 강에 가까워지면 커지고 멀어지면 잦아들었다. 길을 잠시 멈추고 가만히 들으면 재잘재잘 생명을 나르는 소리다. 강을 통해 생명은 태어나고 이동하고 정착하고 다시 죽어 자연이 되었다.
돼지왕은 새벽이슬을 받은 웅덩이에 누워 반신욕 중이었다.
- 킁킁, 왔나? 체면 차리지 말고 이리 가까이 오게. 자네 냄새가 궁금하구먼, 킁킁.
- 싸바이디(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구부리고 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 어떤 소리나 냄새, 생김새는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각인되는 법이라네, 킁킁.
볏이 두껍고 나이가 많아 보이는 갈색 닭이 대나무를 얽은 울타리 사이를 지나 가까이 다가와서 넌지시 말했다.
- 폐하께 드릴 조공품이 있으면 지금 제게 주시오, 전달해 드리리다.
- 죄송합니다만,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당황해서 아무것도 없는 바지 주머니를 헛되이 뒤적이며 말했다. 당장 접견이 취소되고 논을 가득 메운 물소들이 씩씩거리며 뿔을 들이대기라도 할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닭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나지막이 '경우 없는 사람 하고는, 꼬꼬~.'라 읊조리며 푸다닥 대나무 울타리를 건너갔다.
돼지왕이 넉살 좋게 앞발을 휘저으며 말했다. 앞발에 묻었던 구정물이 이리저리 튀었다.
- 보펜냥(괜찮아). 주변을 보라고. '꿀꿀'하고 기름진 땅에 심성 고운 백성들이 넘치는데 메마른 자본주의에서 온 악사에게 받을 게 뭐가 있겠나. 어제도 몇 번 정전이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지내는 데 문제는 없던가?
- 네. 정전에는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이곳 공기가 좋아 제 나라 인천에서는 빈번히 목을 괴롭히던 가래나 코막힘도 없고요, 습한데도 모기가 없어서 밤에도 편하게 잡니다.
- 다행이야. 자네 팔다리가 많이 탔군. 들어가거든 나처럼 '꿀꿀'하고 차가운 물에 반신욕을 해서 열을 식혀주게. 그리고, 동네 주민에게 짐이 부탁했다고 하고 오이나 감자를 조금 빌려서 얇게 잘라 붙이거나 으깨서 바르게. 그러면 금방 '꿀꿀'하게 괜찮아질 게야.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뭘 '꿀꿀'하게 그렇게까지. 라오스 여행은 어떻던가.
오리 선생이 어린 오리떼를 이끌고 와 왕을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꿱꿱. 돼지왕이 악사 인간과 대화 중이니 오늘은 그만 됐다고 물러가게 하자 오리 선생이 어린 오리떼를 뒤로 돌게 해 열을 맞춰 논물을 '하나 꿱, 둘 꿱' 헤엄쳐가도록 지시했다.
- 진심으로 즐기고 있습죠. 방비엥에서는 행장을 다 풀고 몇 년이고 아무 생각 없이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구수하고 뒷맛이 깔끔한 비어라오(라오스 맥주)는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님에도 하루 종일이라도 마실 수 있을 것 같고요, 팍세의 까오삐약센(쌀국수)과 비엔티안의 까오냐오(찰밥), 방비엥의 샌드위치와 루앙프라방에서 먹은 크레페는 모두 천국의 맛이었습니다.
- 응, 다행이군. 여기 여행하는 동안 많이 보고, 충분히 먹고 마시고, 미친 듯이 다니게. 자아는 기억으로만 이루어진다네. 나를 형성하는 건 경험과 기억뿐이야. 기억이 없다면 나는 없는 거지. 킁킁. 실제와 다른, 잘못된 기억도 그대로 내가 돼. 경험과 추억의 '꿀꿀'한 중요성이 여기에 있네. 경험하고 기억하게. 자아는 경험하고 기억하는 만큼만 농밀해져. '꿀꿀'해져.
- 지당하십니다. 여명과 황혼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슷하다고 여기는 사람만큼 메마른 이는 없습죠.
옆에서 시중을 들던 닭이 끼어들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현명한 돼지왕은 물론 '꿀꿀'한 듯했다.
- 내 배를 보게. 이게 다 경험의 산물이야. 일종의 몸의 기억이지. 내 굵은 다리와 닳은 발톱을 보게. 이게 다 경험의 산물이거든. 지금이야 여기 이슬 받은 물에 누워 한가로이 반신욕이나 하고 있지만 말이야. 돌아가기 전에 절에서 탁밧을 나누는 일과 까오팟(볶음밥)에 빠댁(생선젓갈)을 올려 먹는 즐거움도 잊지 말게. 그 맛은 정말 '꿀꿀'하거든.
- 네, 명심하겠습니다.
섬을 끝까지 걸어 도달한 돈콩(콩 섬)으로 가는 다리는 건너지 않고 강가에 난 좁은 길로 빙 둘러 되돌아왔다. 아침인데도 햇살이 강하게 섬을 데웠다. 해는 생명을 잉태하기도 하지만 매정하게 삶을 보채기도 한다. 더위에 지친 생명을 다독이는 건 대개 비와 바람, 달이다. 나는 우기가 빨리 오길 바라며 강 넘어 보이는 사천 개의 섬을 하나 꿀, 둘 꿀 셌다.
사족 대신 족발. 라오스에는 돼지왕은커녕 왕정 따위도 없다. 라오스 북부여행을 마치고 수도로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던 공항에서 만난 라오스 대학생 '숨짱'과 길게 수다를 나누며 식민 제국주의 프랑스, 미국과 싸우고, 민중의 힘으로 왕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세운 역사에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비록 최근에 급격히 자본주의화 하고, 공산당이 주도하는 정치도 세습화하는 경향이 짙어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