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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rliner Jul 29. 2015

해변에서 쉬던 개와의 철학 대담

2008년 겨울, 필리핀 보라카이

- 안녕하세요, 여행 오셨나요? 여유가 넘치시네요.

 고운 모래사장에 엎드린 귀여운 모습에 끌려 친근하게 먼저 말을 건넨 이는 나였다.

- 아니, 나는 여기 보라카이 토박이야. 이 섬 밖으로는 한번도 나가 본 적이 없네.

- 그렇군요. 털이 곱고 다른 현지 개처럼 마르지 않으셔서 오해했어요.


 영화를 촬영하다가 짬이 난 선균 형 호텔방에서 테니스 게임을 하다가 저녁도 먹을 겸 함께 마실 나온 참이었다. 선균 형이 주연인 영화의 음악감독이던 나는 현지 분위기 파악과 회의 등을 이유로 이틀 전 보라카이에 왔다. 분위기 파악이래 봤자 열심히 노는 게 일이고, 짧았던 회의를 제외하면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작곡은 하는 둥 마는 둥 매일 해변을 걷고, 수영을 하고, 비키니를 입은 여성을 구경하고, 선균 형과 게임을 하거나 수다를 나눴다.


- 더운데 바닷물에 몸이라도 담그시지요. 태닝을 하고 계셨던 건가요?

- 털이 있는 동물에게 태닝이 가능하다던가?

- 아, 그렇군요.

 무안함에 멋쩍은 미소.

- 게다가 해변에 산다고 개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바다를 좋아할 거라 생각하진 말게. 이웃 중에는 물을 좋아하는 개들도 있지만 말이야.

 등을 쓰다듬어주려다 퉁명스러운 말투에 팔을 멈췄다. 개도 쓰다듬으려 다가오는 팔을 보고 본능적으로 꼬리를 흔들려다가 민망했는지 멈춘다.


- 여기 해변은 정말 아름답네요. 사람과 나무와 바다와 풍경이 모두 진한 색을 발해서 명도와 채도를 과도하게 올린 사진 같아요. 서울은 한심하게도 온통 흐릿한 시멘트 회색인데 말이에요.

-은 섞이면 투명해지고,

은 섞이면 검정이 된다네.

어느 쪽이 낫다든가 모자란 게 아니야.

감히 을 우월하다 하고,

을 열등하다 할 수 있을 텐가.

- 그렇군요.

 대화를 트고자 별 생각 없이 날씨 얘기를 건넸을 뿐이고, 서울을 상대적 비교로 들어 MSG를 조금 뿌렸을 뿐인데 그렇게까지 꾸짖을 건  없잖아,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상심했다. 어조에 힘이 있고, 말에 메시지가 펄떡거려 주눅이 들었다. 뜨거운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고 경청해야 하는 건 아닌지 잠시 고민했다. 선균 형은 나와 개의 대화를 '찰칵' 한 장 찍더니 별 관심 없다는 듯 쿨하게 돌아 주변 풍경을 감상하고 사진을 촬영했다.


- 감정은 섞이면 우울함일 것이네. 감정은 그러니까 단순하게 하나일 때 행복인 법이지.

 ……절망과 좌절은, 죽음은 검정일 게야. 나는 정말 그렇다고 믿네.

 ……냄새도 섞이면 죽음의 냄새가 돼. 나는 그 죽음의 냄새를 수도 없이 맡았어. 나를 비롯한 많은 동물이 죽음의 냄새에서 평안을 얻기는 하지만 말이야.

- 네.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생명이 희박한 사막 나라들의 고기에서 나는 누린내가 죽음의 냄새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말씀하시는 냄새란 그런 것일 수도 있을까요?

- 그렇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만, 반면에 그 냄새만으로 단정하는 것도 위험하다네. 죽음의 냄새는 한정적이지 않아. 모든 건 섞이면 복잡한 법이야. 흑백론으로 나눌 수 있는 것 따위는 세상에 없다고.

 개의 짖음을 들으며 그리스나 이탈리아에서는 개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보라카이의 개가 이 정도면 철학의 본고장인 그리스, 로마 개들의 꼰대질은 어느 정도겠냐고.


- 멍!

 한참 말을 늘어놓던 고운 털의 철학견이 지겨워하는 내 표정을 눈치 챘는지 크게 한 번 짖었다.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가 다시 앉았다. 미안했는지 꼬리를 살짝 흔들어 준다.

- 내가 한 말들은 신경 쓰지 말게. 자네는 지금 보라카이에 있다는 걸 잊지 마. 댁 같은 여행자에게 필요한 건 단지 이런 것들이야. 먹고, 마시고, 웃고, 사랑하고, 읽고, 자고, 꿈꾸는 거. Eating, drinking, laughing, fucking, reading, sleeping and dreaming.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인사를 하고 일어서자 남은 휴양을 즐기라며 체면 차리지 않고 아낌 없이 꼬리를 흔들어 주어 무척 고마웠다. 손을 흔들며 활짝 웃어줬다.


철학하는 개를 만났던 북부 해변을 지나 섬의 가장 아름다운 서부 해변으로 들어서자 멀리 저물던 해가 누렇게 농익어 바다를 물들였고, 노니는 요트들이 금색의 바다를 가로질렀다. 선균 형은 해산물을 먹자고 했고, 형이 살던 성북동 주변의 맛집들에 끌려가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던 나는 좋다고 했다. 구운 해산물의 향긋함에 어렵게 섞인 말의 파편들은 쉬 잊혀졌다.

 나는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었고, 꿈꿨다.

해변의 개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둘의 대화가 사뭇 진지해 보인다. 이 세기의 대담이 담긴 사진은 고맙게도 배우 이선균 형이 찍어주었다.

*이선균 형과 이민기 군 등이 주연하고, 제가 음악을 감독한 영화 <로맨틱 아일랜드>는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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