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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rliner May 30. 2016

우리 둘만의 보사노바

2013년 겨울, 필리핀 세부 막탄섬

길을 걷다 본 형형색색 빨래와 균등하게 뻗은 매마른 가지가 인상적이었던 나무.

 보사노바 같은 바람이 살랑살랑 귀를 스치고 피부를 식힌다. 함께 나선 연인의 볼은 발그레했고, 호호호 웃지 않아도 눈과 입에서 미소가 흘러 따뜻한 공기 중으로 은은하게 퍼졌다. 평소 가을 같던 깊은 눈가에도 어렴풋이 봄이 스민 듯했다. 내가 좋아하는 눈이다. 나서기 전 들었던 노래 멜로디를 조용히 반복해서 흥얼거린다. 청량하고 강렬한 햇살과 높고 진한 하늘만큼이나 나는 호기로웠고 여유로웠다.


 발길 닿는대로 걷다가 가게든 민가든 공터든 내키는대로 멈춰 구경하거나 허락을 얻어 들어갔다. 흙바닥에서 놀던 아이들은 경계심도 없이 다가왔고, 엄마품에 안긴 아이는 눈을 깜빡이며 이방인을 쳐다본다. 농구를 하던 학생들이 함께 하자며 불러 갑작스레 경기에 참여했다. 몸은 굳은 지 옛날이고, 점프도 기술도 형편 없어졌지만 웃으며 즐겼다. 나이가 들수록 꿈이나 계획, 욕심 따위는 쪼그라들거나 색이 바래고, 적당히 내려놓고 즐길 줄 알게 되면서 자주 행복에 가까이 닿는다. 재밌었다고 악수를 나누고 가던 길을 이어가는데 포켓볼을 치던 청년들도 게임을 같이 하자며 손짓한다. 큐대는 휘었거나 길이가 반쪽인 것도 있었고, 당구테이블은 낡고 모서리가 부서졌지만 게임을 즐기기에는 손색이 없어 보였다. 사이에 끼어 한 게임 즐기고 싶었지만, 청년들이 웃통을 벗고 있었고, 산 미구엘 맥주병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함께 온 '가을'을 생각해 사양했다.

농구를 함께 했던 현지인 몇 명과 기념 촬영.
새 기타를 지고 지나던 아저씨.

 통기타를 어깨에 진 아저씨가 지나친다. 검게 탄 피부와 거친 손가락으로 미뤄 짐작컨대 아무래도 뮤지션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기타가 그려진 간판과 거대 기타모형 간판도 지나는 길에 봤던 걸로 생각하면 부근에 기타 공방이 있는 듯했다. 공방이 가깝다면 들르려고 땅을 얕게 파고 앉았던 닭에게 위치를 물었으나 답 없이 고개를 돌린다. 분명 내 말을 알아들은 듯했지만 다시 묻지 않고 일어섰다. 남편이 집을 나갔거나 사람에게 악감정이 있는지도 모른다. 지나는 길에 누워 졸거나 쉬는 개를 몇 마리나 지나쳤지만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려 역시 물어보지 않고 조용히 지나쳤다. 기타 아저씨가 오던 길을 거슬러  걷다 보면 나오겠지.

 사진을 찍으며 조금 뒤에서 따라오던 가을이 손을 내밀어 손을 잡고 함께 걷는다. 날이 더운데도 손은 가을이다. 추운 날이면 칼처럼 차서 베이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가을을 녹이는 건 내 중요한 일이다.

 길을 잃었다. 잡풀이 허리께까지 자란 공터로 들어왔는데 길은 없고, 곳곳에 웅덩이나 바위가 위험하게 잡풀 밑에 숨어 있었으며, 잡풀은 갈수록 험하고 거칠게 얽혀 걸음을 막았다. 농구를 하면서도 땀이 나지 않았던 나는 잡풀을 밟아 가을을 위한 통로를 만들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쓰는 통에 온통 땀으로 젖어버렸다.
 너무 깊이 들어왔다. 이제 와서 헤쳐온 길을 되돌아 나갈 수도 없었다. 저 멀리 사람이 사는지 폐가인지 모를 허름한 집이 보였지만 그 쪽으로 발걸음 내딛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잡풀 여기저기 붙은 벌레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답이 없다. 대부분 못 들은 체하거나 놀라 도망간다.
 길은 자연이 허락해야 가능하구나. 그깟 기타 공방이 뭐라고 깊이 들어와 버렸는지. 청량하던 날씨마저 마음처럼 궂어졌다. 조만간 스콜이 쏟아질지도 모른다. 이미 비를 맞은 듯 옷은 땀으로 축 늘어졌지만 뒤에서 따르는 가을은 어쩌나. 경솔함과 미안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여기는 사람 다니는 데가 아닌데.
 덤불 밑으로 염소가 잎을 씹으며 혼잣말을 한다. 길을 헤치며 위험을 감지하려 오감을 곤두세웠던 터라 용케 들은 나는 어떻게든 도움을 얻을 요량으로 나갈 방법을 간청했다.
- 글쎄, 내가 도울 수 있을까 몰라. 저 집에 내 주인이 살기는 해. 허름하다고 다 빈 집은 아니라고.
- 죄송합니다. 무례하게 지나려던 게 아니라 단지 기타공방을 찾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들어와 버렸어요.
- 왜 당신들 그 좋은 GPS인가, 네비게이션은 어쩌고.
 주위의 곤충과 뭔지 모를 생명체 몇몇이 웃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난다. 크륵크륵. 웃을 기분이 아니었고, 얼마간 마음도 상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인다. 가을이 이런 나를 보지 않길 바라며.
- 내가 가는 뒤를 따라오게. 바위나 늪지를 피해서 우리가 덤불 밑으로 낸 길이니까 덤불 위만 걷어내면서 따라오면 조금은 수월할 거야.
-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 여자친구 앞이니까 그렇게 빌빌대지 않아도 돼. 고개 좀 들고.
 크륵크륵. 머리를 긁적이며 이번에는 나도 주위 웃음소리를 따라서 웃었다. 염소의 길이래봤자 여전히 헤쳐가기 힘들었고, 가을에게는 무척 거친 길이었지만 어떻게든 폐가, 아니 염소 주인집은 조금씩 가까워졌다.

겨우 빠져나온 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차들이 다니는 (문명의)길까지는 다시 현지 청년의 도움을 얻어 뒤를 한참 따라 걷고서야 겨우 가능했다.

- 뭐야. 저 숲을 인간이 어떻게 지나온 거야?
 집을 지키던 개가 멍멍 염소 뒤를 좇아 엉덩이 냄새를 맡으며 묻는다.
- 저리 좀 가, 이 놈아. 헤매기에 좀 알려준 것 뿐이라고. 저 한가운데서 소리를 지르거나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우리가 곤란하잖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조용했다. 가을은 손수건으로 목의 땀을 닦고, 옷에 묻은 것들을 떼어냈다. 손등이 살짝 긁히기는 했지만 햇살에 타지 않으려 둘 다 긴바지를 입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가을이 옆으로 다가와 걸으며 배가 고프다고 했다. 샤워하고 밥을 먹자. 미안했어. 끝말은 꿀꺽 삼켰다.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보사노바 음악이 흐른다. 나오는 길에 가을이 반복해서 흥얼거렸던 멜로디다. 산 미구엘을 맞부딪쳤다. 첫 모금에 반 이상을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따사로운 초여름이, 알싸한 설렘이 흐른다. 곧 볼이 따뜻해질 게고,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질 참이다.
 빠라라라 빠빠빠빠라. 그 남자와 그 여자가 보사노바 리듬을 따라 흥얼거린다. 세상에 다시 둘만 있었다. 이번에는 잡풀이 무성한 공터가 아니라 노란 등이 켜진 해변의 썬베드다.
 야자수가 저녁 바람에 흔들리며 노란 조명을 춤 추게 했다. 보사노바 같은 날이다.

보시노바 같은 날이다.
결국 기타 공방에 들렀다. 우크렐레를 살까 했지만 연주나 녹음을 하기에는 상태가 좋지 않아보여 구경만 했다.  

이 글은 포크라노스 블로그에도 연재되었습니다.

음악감독이자 인디밴드인 티어라이너는 드라마 '치즈인더트랩', 과거에는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과 영화 '트리플'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활동해온 뮤지션입니다. 최근 기존에 발표하지 못 했던 미완성곡들 중에서 좋은 곡들을 엄선, 그간 본인이 여행을 다녀온 도시들을 테마로 곡을 완성해 발표하는 컨셉트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그 첫 시작으로 4월에 발표한 [내 작은 기억들 @KYOTO]는 배우 최강희가 보컬로 참여하기도 했었죠.
내 작은 기억들 @KYOTO
이번에 발매된 여행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품인 [우리 둘만의 보사노바 @CEBU]에는 상큼한 음색의 보컬리스트 '타루'가 함께했습니다. 홍대여신으로 불리며 다양한 활동으로 넓은 팬층을 가지고 있는 타루는 '커피프린스 1호점', '트리플', '로맨틱아일랜드', '치즈인더트랩' 등 티어라이너가 음악을 감독한 드라마, 영화에 참여하기도 했다는데요. 서로의 의견을 공유해 즐겁게 작업했다는 이번 앨범, 어쩐지 듣는 것만으로 세부의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나요?
마침 티어라이너가 직접 촬영하고 느낀 여행기를 포크라노스로 보내왔습니다. 아름다운 필리핀 세부의 풍경, 티어라이너의 신곡을 들으며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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