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초여름, 에스토니아 탈린TALLINN.
정말이다. 나는 명중시켜야 하는 목표라면 그게 뭐든 자신 있었다. 군에서 사격도 최고점수였고, 코타키나발루의 민속마을에서 처음으로 체험했던 입으로 부는 독침도 매번 코코넛에 명중시켜 입을 다물지 못하는 현지인의 찬사를 받았었으니 화살이 표적에 그렇게 안 맞을 줄은 상상치 못했다.
무척 분하고 자존심이 상해 광장의 중세풍으로 꾸민 펍에 무턱대고 들어간 나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화를 씻어내고 있었다.
조금 전에 나는 중세식으로 꾸민 양궁장에서 10유로를 내고 중세식 활을 쐈다. 허술한 곳에 묵고 싼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비가 아까워 걸어 다니며 거지 여행하는 내게는 큰돈이었지만, '중세 활 정도는 장난감이지, 한 수 보여드릴게'라는 심정으로 웃으며 장비를 착용하고 과녁 앞에 섰다. 대충의 방법과 룰을 배우고, '방법 따위 몰라도 오케이오케이, 신궁에게 뭘 그리 훈수를 두나' 기세 좋게 활시위를 놨지만 쏘는 족족 화살은 중앙을 벗어났다. 나는 사격이 그러하듯 전 화살의 방향을 통해 나름의 눈대중으로 다음 화살을 재겨냥하고 쐈지만 빌어먹을 화살은 매번 의도와 다르게 날아갔다. 100점에 54점을 쏜 나는 패잔병처럼 풀이 죽어 양궁장을 나오며 잔디에 겨냥을 하고 쏴야 했을 정도로 낮았던 애꿎은 과녁만 탓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고민하며 오이지를 우걱우걱 씹어먹는데, 한 여성이 가게에 들어서다 내부의 중세 장식들에 깜짝 놀라며 멈춰 섰다. 뒤편에 앉았던 리투아니아 커플이 그 모습에 큰 소리로 웃는다. 나도 들어오다 놀랐다고 그녀를 안심시키며 1미터가 넘는 꼬챙이를 들어 내 옆에 있던 커다란 나무통에서 오이지 두 개를 찔러 꺼냈다. 자르지 않고 통째로 절인 오이지는 에스토니아 어디서든 흔히 맛볼 수 있는 김치 같은 반찬이자 안주다.
- 이거 공짜예요. 그렇게 짜지 않으니까 많이 가져가 들어요.
엘크 수프와 소시지를 시키고 오이지를 담으러 그릇을 들고 곁으로 온 그녀에게 말했다. 리투아니아 커플이 또 키득키득 웃었다.
- 고마워요. 당신도 여행객이죠? 탈린은 어때요?
- 탈린은 나쁘지 않지만 리가(라트비아의 수도)에서 실컷 먹었던 체리가 다시 비싸져서 아쉬워요. 게다가 양궁장은 정말 엉망이었어요.
- 그래요?
눈을 크게 뜨며 쳐다본다. 양궁장 얘기는 웬 소리냐 라는 듯.
- 별 거 아니에요. 어때요, 탈린 관광은 즐거우신가요?
머쓱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오이지 한 입 우걱.
- 글쎄요. 즐겁지 않다기보다는...사실은요.
허기졌던 듯 숟가락을 빠르게 후룩후룩 입으로 가져가던 손놀림을 멈추고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틈을 준다, 이런 얘기 해도 되는 걸까 라는 듯.
- 여행 중에 만나서 같이 다닌 친구가 있어요. 여행이 그렇잖아요. 때로는 둘이 되었다가, 셋도 넷도 되었다가, 다시 하나가 되기도 하는. 그 친구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만나 이틀 정도 함께 했는데, 내가 슬로바키아로 먼저 들어가면서 헤어졌어요. 연락처를 묻기에 페이스북 주소도 교환하고, 마지막에는 기차역까지 배웅해 줘서 포옹도 했던가 그렇고요. 아쉬웠죠, 그렇지만 거기까지였어요. 함께 하다 헤어지면 대개 그렇잖아요. 딱 그 정도.
오이지 우걱.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흥미롭다. 리투아니아 커플은 술집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뜻 모를 현지어로 몇 마디를 나누는 듯했지만 대부분 영어로 대화하는 걸 보면,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는 쓰는 말이 다른 듯싶었다.
- 그런데 체코를 여행하는 중에 연락이 온 거예요. 자기도 체코에 왔는데 함께 다니고 싶다고. 전 프라하에 있었고, 그는 체스키 크룸로프에 있었는데 오겠다는 거예요. 같은 체코지만 두 도시는 거리가 좀 되거든요.
- 응, 맞아요. 저도 여행을 했던 곳이라 기억해요. 왜 그랬을까요?
- 그게 궁금했어요.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같이 다니면서 즐겁고 편하기도 했기에 그러자고 했죠. 그런데 말이에요, 제가 묵는 호스텔 로비에서 다시 만난 순간 나를 보던 그 눈빛이, 그 표정이, 그 미소가 잊히질 않아요.
- 과했나요?
- 아니요. 깊었어요. 어느 정도 야릇하기도 했고요. 그 눈빛은 뭐랄까, 간지러웠어요.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는 팔목까지 내려 입었던 셔츠 단추를 풀어 팔뚝까지 끌어올렸다. 중세를 흉내 낸 실내는 지독하게 어두웠지만 손등을 볼에 대는 행동을 통해 얼굴이 상기됐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 그 후로 함께 여행했어요, 폴란드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를 거쳐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까지.
- 응? 탈린은 함께 오지 않았어요?
손톱을 문 채 질문에 답이 없다. 나는 이제 망쳐버린 양궁 점수 따위는 까맣게 잊었지만, 여전히 갈증이 일었다. 다음 이야기에 대한 갈증이었을까, 어쩌면 짠 공짜 오이지로 배를 채워서인지도 몰랐다. 얼마 남지 않았던 맥주잔 바닥을 천장까지 들어 올려 꿀꺽.
- 에스토니아는 함께 하지 않았어요. 라트비아에서 헤어졌죠. 그러는 게 좋겠다고 말했어요. 이유를 묻더군요. 이런 기분 알아요? 농담일 거라는 듯 쳐다보면서 웃는데 자꾸 숨이 가빠 오더라고요. 그도 나를 좋아하나 하는 오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이 끝나면 헤어질 텐데, 각자의 나라로 돌아갈 텐데, 더 좋아져서 힘들기 전에 각자의 길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먼저 마음을 닫았구나. 상대방의 마음도 모르는데 활짝 열어젖혀서 영영 못 닫기 전에. 걱정일랑 죄다 지워지고 한 감정으로 섞여버리기 전에. 창 밖을 봤다.
- 탈린에 대해 물었죠? 설명이 길었네요. 답은 이래요. '색이 없어요.'
- 혹시 당신도 양궁을 했나요?
하, 끔찍한 농담이었지만 못 알아들어 다행이다.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색이 없다니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다고 말했다. 남은 오이지 조각을 마저 우걱.
- 어디를 가든 자꾸 그가 맴돌아요. 저걸 봤다면 이런 표정을 지었을 텐데, 저걸 먹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텐데, 내가 힘이 없을 때 '오늘은 이만 됐으니 현지 제조한 맥주 탐방이나 나가자'라고 말하던 기막힌 타이밍이 바로 지금인데. 그런 상상을 하면 눈이 감겨와요. 그 눈빛, 그 표정, 그 미소를 떠올리죠.
- 그건 사랑인가요?
- 모르겠어요. 애써 무시했지만 옆에 없으니 새삼 강렬해지는, 이런 감정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힘들어요. 감정이라는 게 피부색이 달라도,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만국 공통인 것 같지만, 또 지독하게 주관적이라 개개인마다 다르게 다가가고 느껴지나 봐요. 사랑이냐고요? 사랑이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
- 어쩌면 오이지 같은 건지도 모르죠.
- 탈린은 그래서 제게 색이 옅어요. 이 답을 하느라 이렇게 돌아돌아 왔네요.
멋쩍게 웃으며 숟가락을 든다. 수프는 다 식어버렸을 것이고, 건더기는 죄 바닥에 가라앉았을 것이다. 색도 없다. 그렇다고 맛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 지금부터라도 탈린을 짙게 색칠하는 건 어때요? 어쩌면 그 친구는 한걸음에 달려올 거예요, 체코에서 그랬듯.
그녀가 눈을 찡그렸다가 지그시 떴다, 마치 실내가 다채로워 눈부시기라도 한 듯. 어쩌면 그녀에게 탈린의 색이 돌아온 걸까. 덧붙이려던 '그 친구와 양궁장만 가지 않으면 돼요'라는 엉터리 농담을 이번에는 꾹 삼켰다.
어쩌면 나는 최악의 궁수는 아닌지도 모른다.
드라마 '치즈인더트랩', 과거에는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과 영화 '트리플'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활동해온 음악감독이자 뮤지션 티어라이너! 그가 이번엔 일명 홍대여신, '라이너스의 담요'의 '연진'과 만나 함께 새로운 곡을 완성해냈습니다. 이번 디지털 싱글은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네요. 여행지를 테마로 한 싱글 연작의 세 번째 프로젝트인거지요. 티어라이너가 '에스토니아 탈린' 여행기를 보내왔습니다. 직접 찍은 사진과 글. 연진과 함께 한 이번 노래를 들으며 그곳을 상상해보는 것도 좋겠네요!
이 느낌은 뭘까? @TALLINN
아티스트 티어라이너(Tearliner)
발매일 2016.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