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Matejko - Stańczyk @ 바르샤바 국립박물관
2016년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를 지나 폴란드를 여행하던 중 바르샤바 국립박물관에서 나를 완전히 매혹시켰던 얀 마테이코Jan Matejko의 작품 스탄치크Stańczyk. 얀 마테이코의 그림에서 궁정 광대 스탄치크는 의욕 잃은 멍한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그의 뒤로 왕과 귀족들의 파티가 한창이다. 그의 무기력한 무표정과 화려하고 동적인 파티장의 대비는 극적이다. 광대 스탄치크가 이미 공연으로 분위기를 올린 이후인지, 아직 공연에 나서기 전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땀을 닦고 대충 던져놓은 듯한 테이블 위의 수건과 땅에 널브러진 장식용 부채, 앞 단추가 거칠게 풀린 광대복을 통해 그가 이미 공연을 마친 후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허무하다. 모든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며 관객을 웃겼지만, 그의 공연은 그보다 높은 위치의 관객들이 긴장을 풀고 즐겁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다. 그들과 섞여 파티를 즐길 수도 없다. 웃음과 찬사는 헛되고, 공연 후의 허무함은 시리다. 노예나 평민들과 달리 고풍스러운 궁정에 머물기는 하지만 그의 위치는 여전히 낮으며, 땀의 보상은 하찮다.
귀족 앞에서 공연을 마친 후 퇴장한 그가 의자에 걸터앉아 느낄 그 허무와 절망을 나는 깊이 절감한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초점 없는 눈과, 무력감을 애써 감추지 않는 표정을 나는 뮤지션으로서 공감한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어디에선가는 광대가 아닌가. 자리에 맞는, 상대에 맞춘 가면을 쓰고 그에 맞는 연기를 하는 사회적 광대들 아닌가. 대상이 상사든, 손님이든, 부모든, 지인이든 관계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 무거운 몸을 의자에 앉히면 스탄치크와 다를 바도 없는 광대. 스탄치크는 사회에서 부대끼는 우리 모두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바르샤바에서 나는 그림 속 궁정 광대 스탄치크와 함께 좌절했고, 함께 분노를 직시했으며, 깊은 허무에 침잠했다.
얀 마테이코가 폴란드에서 사랑받는 국민화가여서인지 스탄치크는 스트리트 아티스트 HOGRE의 그라피티로도 접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다르게 보이더라. 비록 얼굴이 긁혀서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강렬함이 살아있는 저 눈과 핑크색으로 채색된 드러난 치아를 보라.
얀 마테이코의 그림 스탄치크처럼 2009년 포르투갈 여행 중 소아레스 도스 레이스 미술관Museu Nacional de Soares dos Reis에서 보고 단박에 사랑에 빠졌던, 화가 엔히크 포우종Henrique Pousão의 ‘성공을 기다림Esperando o sucesso’도 배낭여행을 통해 접하고 애정하게 된 그림이다. 예술가의 수줍은 동심과 희망을 이렇게 사랑스럽고 현대적인 화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채팅 어플 프로필 이미지로 걸어둔 작품이기도 하다.
엔히크 포우종은 고작 25세에 결핵으로 요절했는데, 만약 피카소처럼 장수했다면 얼마나 멋진 작품을 남겼을지 안타깝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천재와 예술가들이 재능을 채 피우지도 못하고 질병이나 전쟁 등에 스러져 갔을까.
*언젠가 최애 화가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에 대해서도 장문의 감상평을 남겨야 한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며 단순히 감정을 살찌우는 데 그치지 않고, 본업인 음악에 크고 작은 영감을 얻기도 했으니 얼마간 빚을 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