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가을, 포르투갈 포르투PORTO
이른 아침부터 나선 골목 탐사로 나른해진 몸을 쉬이려 로사 모타 공원Pavilhão Rosa Mota 벤치에 앉아 사과 한 알을 사각거리며 먹었다. 오늘의 점심식사.
정오인데 해는 낮다. 적도에 가까운 나라라고 해도 늦가을의 해는 적잖이 기가 죽었다. 왼편으로 먼 벤치에 노숙자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맥주병 옆으로 검은 비닐봉지와 둥글게 말린 담요가 놓여 있었다. 잔디를 깎은 지는 좀 되어 보였지만 향긋한 풀내음이 진동했다. 풀을 한 움큼 머금은 산들바람이 간간이 불어와 젖은 등을 식혀주었다. 조용한 오후의 수줍은 바람.
“어이, 거기.”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를 따라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과를 씹던 입놀림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여기야, 여기.”
“……?”
“물 있으면 한 모금만 내 몸에 좀 뱉어주게. 부탁이네.”
다섯 보폭 앞의 길바닥에 뭔가가 꼼지락거린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공원 잔디에서 바닥돌이 깔린 산책로로 잘못 나온 지렁이였다. 버둥거리며 생명의 끈을 놓지 앉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태양의 칼날을 오래 버텨낼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록밴드 드림 씨어터Dream Theater의 투어 공연을 준비 중인 멀리 야외공연장 세트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둔탁한 드럼 소리가 녀석의 심장소리 같아 안쓰러웠다.
“어쩌죠. 죄송하지만 물이 없어요.”
미안함을 덜어보려고 손을 들어 소지품을 보여주었다. 네 겹으로 접은 포르투 관광지도와 볼펜이 끼워진 메모장, 먹던 사과가 전부였다. 사과라도 손으로 으깨 즙을 몸에 적셔줄지 물어볼까 잠깐 고민했지만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고, 점심식사였기에 조금 아깝기도 했다. 저녁까지 돌아다니려면 씨까지 씹어 먹을 참이라고.
“알았네, 가보게. 그리고 행여라도 저기 저 노숙자 녀석에겐 말하지 말게. 저 녀석에게 못된 짓을 당한 친구가 한둘이 아니거든. 어쩌면 자네에게 시비를 걸지도 모르고 말이야.”
크게 실망한 듯 몸을 거칠게 비틀며 말했다. ‘지금 제 걱정할 때입니까.’ 나오려는 말을 씹던 사과와 함께 꾸욱 눌러 삼켰다. 지렁이 엉덩이에서 누런 액이 조금 흘러나와 마른 땅을 적셨다.
“네네, 그럴게요. 도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서둘러 인사를 하고 벤치로 물러났다. 해는 우리 대화를 빤히 쳐다보며 죄다 듣고 있었다. 물러나는 나에게 경고라도 하듯 강한 열과 빛을 내리쬔다. 알았다고, 이 인정머리 없는 양반아.
벤치에 앉아 사과를 마저 먹고 쓰레기통에 버린 후 공원을 나서는 길에 지렁이에게 다시 가봤다. 병문안이라도 가는 기분. 매끄러운 몸에 흙이 잔뜩 묻은 채 동글동글 말려 금세라도 숨이 끊어질 기세였다.
익숙하지 않은 세계에 떨어져 죽음을 앞둔 녀석이 안쓰러워 잔디밭에 던져주었다. 이제부터 죽고 사는 건 네게 달렸다. 아등바등 여행하는 내 모습도 네 녀석과 별반 다를 게 없지, 보금자리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보겠다고 떠나왔지만 바짝바짝 마르고 상처받는 고생길에 다름 아닌.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포르투의 구시가를 밤늦게까지 돌아다녔다. 물론 나는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셨고, 더우면 그늘에서 쉬었다. 몸에 흙을 묻히지도, 엉덩이로 누런 액을 배설하거나 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