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 한상 차림
구워 먹기만 해도 맛있는 고기가 싫다는 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 싶겠지만…. 나도 소고기라면 자다가도 일어날 만큼 좋아했다. 양념장에 재워둔 불고기, 얇게 썬 무를 넣고 시원하게 끓인 소고기 무국, 장조림 등등 소고기가 들어간 반찬에 눈이 돌아가던 시절도 있었다. 그 비싼 고기가 싫어진 건…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흔하디 흔한 이야기다.
우리 집은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가고 싶지 않았던 대학을 취업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친구를 따라 입학했고, 적성에 맞지 않아 군대로 도망쳤다. 내가 생각했던 건 모두 환상이었다. 말장난처럼 자리만 보장될 뿐이었다. 알바보다도 못한 일자리였다. 게다가 간판도 되지 못할 대학을 4년제 학비를 내고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내게 중요한 건 돈보다 시간이었다. 그러나 졸업 이후 나에게 보장된 것,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능한 내가 한심했다. 전역 후 복학을 망설이던 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
체감이 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돈 걱정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처럼 달콤한 말이 어디 있을까? 아버지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려는 듯 소고기를 먹자고 하셨다. 정육 식당, 그러면 그렇지 그 비싼 소고기일 리가 없지. 한 팩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소고기는 소고기였다. 이 돈이면 삼겹살을 배부르게 먹고, 남은 고기로 김치찌개를 끓여 먹어도 충분할 터였다. 우리 다섯 식구가 한 근이 채 되지 않는 양으로 배를 채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 뭐 이걸로 ‘입가심하고 국거리 사서 무국이나 끓여 먹으면 되지’ 그런 생각으로 다른 냉장고에 있는 국거리를 집어들었다.
“겨우 그걸로 배가 차겠냐.”
거침없이 고기들을 집어 드는 아버지의 손길에 나는 선뜩 겁이 났다. 그 돈이면 사고 싶어 며칠 밤을 지새던 신발을 사고도 남았을 테니까.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씀드리자
“그럼 밥 먹고 신발 사러 가자.”
처음이었다. 무한 리필집 조차 가본 적 없는데 소고기를 배부르게 먹은 것도, 안심, 등심밖에 모르던 내가 살치살 혹은 눈꽃살이라고 불리는 부위를 먹은 것도. 눈꽃살, 이름처럼 선홍빛의 들판에 내려앉은 눈꽃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트에서 보던 소고기의 마블링과 다르단 걸 알 수 있었다. 맛 또한 그랬다. 바짝 익히지 않고 적당히 구워낸 고기를 별다른 양념 없이 소금을 살짝 찍어 입안에 넣는 것만으로도 녹아내리는 기름과 육즙이 혀끝에 감기며 맛있다는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고기가 입에서 녹는다는 걸 실감한 날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다고 말씀하셨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선망하기만 하던 조던을 신고 있었으니까.
그날 이후, 소고기가 땡기는 날이면 소고기를 먹었고 냉장고엔 항상 구워 먹을 소고기가 채워져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런 걱정 없이 흘러가던 하루, 학교에서 문자가 왔다. 복학 신청을 하지 않으면 제적 처리가 된다는 안내 문자였다. 상관없었다.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고 간판조차 되어주지 못할 학벌이었다. 무시했다. 겁이 없었다. 무서울 것도 없었다. 아쉬울 것 또한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알바를 하는 다른 아이들처럼 통장에는 돈이 차곡차곡 쌓였으니까.
도취되었다. 그 모든 게 내 것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이미 성공한 것 마냥 근처 커피숍을 유랑하며 유유자적한 한량 생활을 즐겼다. 우스운 일이었다. 문턱조차 넘지 못한 아마추어가 무슨 자신감으로 자부했던 걸까? 1년 아니 2년 안에는 성공해 보이리라. 나에게 그 정도 재능은 있을 테니까. 결과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안일했다. 세상은 생각처럼 녹록지 않았다. 공모전엔 거듭 낙방했고 예심조차 들지 못했다. 나날이 무능해졌다.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제자리에서 걸음조차 떼지 못했다. 괜찮아, 아버지가 지원해주신다고 했으니까. 서른… 서른까지만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두자. 그조차 오만이었다.
“미안하다.”
내 나이 스물일곱, 다시 공부를 하기도 기술을 배우기도 애매한 나이…. 아버지는 서울의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벗어나려 했던 지방의 아파트로 회귀하셨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던 한적한 집안에 시끄러운 티비 소리가 하루 종일 집안을 떠나지 않고 울렸다. 모든 불이 꺼지고 가로등마저 저문 늦은 밤에도 티비는 꺼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습관 탓이었다. 모텔방을 전전하시던 아버지는 그 소음이 없으면 주무시지 못하셨다. 그 소리의 장벽이 허름한 벽 너머로 넘어 드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막아주었으니까.
세상에 무서움을 모르던, 이상을 꿈꾸며 비상을 염원하던 아무것도 아닌 나는, 멈춰서야 했다. 이상도 날개가 꺾이는 세상인데 무력한 나는 주제 넘은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철저하게 무능했고 나 스스로를 먹일 능력조차 없었다. 아니 딱 하나… 한량 시절 고상한 취미를 갖고 싶었던 나는 독학으로 커피를 익혔다. 갓 내린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타자를 치는 모습을 상상하며 같잖은 망상에 빠져 카페를 운영하며 글을 쓰고 싶었다. 나는 그 비장한 꿈을… 시시껄렁한 소망처럼 자주 가는 카페 사장님에게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그런 바람이, 기울어가는 가세처럼 바리스타가 되어야 한단 기도로 기울었다. 그 기도의 무게를 체감하기 전까지 실감하지 못했다.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나는 감히 내뱉지 못했다. 나에게 무엇이 남아있다고 미련하게 목을 쥐고 있는 걸까? 속앓이를 견디지 못하고 곧잘 하소연했던 덕인지 사장님에게 먼저 일자리를 제안해주셨다. 아는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데 가서 일 해볼 생각 없냐고. 막연하게 바라던 제주, 구상 중이던 소설 배경으로 염두하고 있던 차였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마추어에 불과한 내가 곧장 취직할 순 없었다. 그러니 수련은 불가피했고 당연하게도 수업료가 필요했다. 땀을 흘리지 않아도 쓰면 채워지는 삶에 익숙했던 내게 만약을 대비해 둔 적금이 있을 리 만무했다.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백수 한량이 무슨 염치로 수업료를 달라고 말하겠는가. 막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남은 것이, 그것 뿐일진 데도.
“사장님한테 가르쳐달라고 말이라도 해봐라.”
어머니가 말을 꺼내셨다. 그간 나의 행실을 곱게 보지 않으셨던 어머니였기에. 나는 불퉁거리며 기술을 어느 누가 선심 쓰듯 대가 없이 알려주겠냐고 쏘아붙였다. 나의 무능을 당신들에게 돌렸다. 나의 희망이 꺾인 것이 그대들 탓이라 치부했다. 그런 나에게 당신은 새하얀 봉투를 건네주셨다. 그 봉투가 무거워, 버거워 눈물이 났다.
제주로 떠나기 바로 전날, 어머니는 오랜만에 외식을 하자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일전에 자주 가곤 했던 정육 식당이었다. 달갑지 않았다. 그동안 먹지 못했던 살치살로 시선이 향했으나 우리 손에 들린 건 자투리를 모아둔 모듬팩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겨우 2팩, 다섯 식구인 우리 가족이 먹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더 먹겠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아니 괜찮아, 냉면 먹고 싶어.”
냉면은 전형적인 인스턴트의 맛이었다. 다시다를 물에 푼 것만 같은 강한 조미료가 가미된 듯한 육수와 메밀 가루인지 의심스러운 딱 달라 늘어붙은 면, 고명은 채 썬 오이가 전부. 엉터리였다. 정육점이 바로 붙어있는 식당이 사골 육수도 빼지 않다는, 설렁탕을 팔지 않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을 우리 가족은 모르고 있었다. 먹고 싶지 않았다. 당장이라고 일어나 정육점 냉장고에서 살치살을 꺼내 불판 위에 올리고 싶으나, 젓가락을 들어 면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허기를 채우면 그런 생각도, 욕구도 사라질 테니까.
턱없이 부족해야 할 고기가 불판 위에 남아있었다. 어머니는 남아 있는 고기를 모두 집어 내 앞접시 위에 올려주셨다.
“안 먹어. 배불러.”
거짓말.
“그래도 고기 남았으니까, 다 먹어야지. 아깝잖아.”
어머니는 다시 내 접시 위에 고기를 올려주셨지만 나는 도로 어머니에게 돌려드렸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아, 안 먹는다니까!”
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시끄러운 고깃집에 잠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식탁 위에 불안하게 떠있는 당신의 젓가락이, 가슴을 쿡 찔러들어 나는 이를 꾹 악물었다. 식초와 겨자를 집어들어 냉면에 힘껏 털어넣었다. 지금 이 분위기를 털어내려는 것처럼.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동생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옛날에 비해 고기는 질긴데다 육즙도 없다시피 했고 씹을 때마다 냄새가 나서 눈살을 찌푸러들게 했다고. 그래, 그럴만도 하지. 싼 고기였으니까, 소고기라는 단어조차 부끄러운 값이었으니까.
“진짜 맛 없었어. 이제 소고기는 안 먹을래.”
그건 누구한테 하는 말이었을까.
제주에 대한 로망은 금세 고갈되었다. 들떠있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알바조차 해본 적 없는 나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울고 싶은데 웃어야만 하는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남의 비위를 맞추고 수발을 드는, 한 평생을 미용사로 사신 어머니는 이런 나날을 어떻게 버티셨던 걸까. 당신은 웃음 뒤에 모진 가슴을 감추고 어찌 이 고단한 세월을 견디셨을까. 그날 따라 고기가, 소고기가 먹고 싶었다.
“엄마, 나 집에 가면 불고기 해주라.”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털어놓고도 응어리를 털어낼 수 없었다. 버텨야 될 이유가 필요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동안 용돈으론 엄두도 내지 못했던 맥북을 할부로 결제했다. 1년, 적어도 1년은 버텨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래야만 바로 설 수 있을 듯했다. 알고 있었다. 맥북 따위가 아니어도 나는 그곳에서 버텨야만 했다. 이제 막 입학한 막둥이의 등록금을 마련해야만 했기에. 그런데도 나는, 버티지 못했다. 그로부터 석 달, 운명의 장난인지 신의 농간인지 모를 불운이 기승을 부린 탓에.
COVID-19. 중국 관광객이 유난히 많았던 제주는 내국인 관광객이 눈에 띄게 줄었고 매출 대부분이 내국인이던 나의 첫 직장은 사태 이전에도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다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간 가계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그나마 도망치지 않았단 사실만이 위안이 되어줄 뿐이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을까?
배를 타고 육지로 돌아왔다. 목포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3시간, 부모님은 그 먼 길을 나를 맞이하러 나오셨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는데도…. 내가 육지에 발을 들인 건 저녁 7시, 부지런히 달려야만 했다. 나 까짓게 피곤한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일이 없으니 하루종일 늘어지게 자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그 먼길을 내달려 2시간 반만에 집에 도착한 이유는 내일 아침 출근하시는 어머니, 우리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는 당신의 충분한 수면을 위해서였다. 밤이 늦은 탓에 대충 짐을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가 잠에 빠져들었다. 아니 잠든 척 했다. 밤은 좀처럼 가물지 않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의 아침은 분주했다. 아무것도 아닌 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침묵하길 그저 기다리고 기다렸다. 집안에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나는 겨우 방에서 기어나왔다. 배가 고팠다. 한심했다. 식충, 딱 그짝이지 않은가.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꼬르륵, 허기가 고요 속에 떠올랐다. 염치없이 고개를 드민 허기를 밀어넣고 싶었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걸음을 멈추고서 후, 한숨을 내리눌렀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 무엇이 부끄러운 걸까.
부엌,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와 팬이 놓여있었다. 바쁜 어머니는, 꿈을 좇던 시기에도 이렇듯 국과 반찬을 해두고 가셨다. 평소처럼 국에 밥을 말아 허기만 대충 때우려 했는데 냄비는 그렇다치고 팬은 도대체 뭐지? 뚜껑을 열자 김이 나지 않는데도 느껴지는 뜨거움에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이로 꾹 짓눌렀다.
불고기, 지나가듯 말했던 말을 당신은 아로새기고 있었던 걸까.
우리 집은 전해 내려오는 비밀 레시피 같은 건 없었다. 슈퍼에서 파는 불고기 양념, 정육점에서 썰어준 불고기 거리에 새송이 버섯과 양파, 파 등을 넣은 평범한 불고기였다. 불고기란 이름이 무색하게 불 맛도 나지 않는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음식에 주책 없이 눈물이 났다. 달곰한 양념장이 고기를 씹을 때마다 혀 끝에 은은히 번져 짭짤한 간장의 맛이 입맛을 돋웠다. 하얀 쌀밥 위에 불고기 국물을 부어 자작하게 말아 후루룩 후루룩 국밥을 먹듯 들이켰다.
잠깐 그러고 보니 냄비가 하나 더 있었는데 불고기에 눈이 멀어 잊고 있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향한 나는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속이 깊은 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소고기 무국이었다.
‘설마…’
냉장고로 향했다. 그 안에는 소고기 장조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상을 차렸다. 하얀 쌀밥과 소고기 무국에 반찬으로 소불고기와 장조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특별한 레시피가 없어도, 음식을 허투루 만들지 않았다. 막냇동생이 서울에 자취방을 얻어 재수를 하던 시절, 장조림이 먹고 싶다는 어리광에 어머니는 고된 바깥일을 마치고 마늘과 생각을 넣은 간장을 몇 시간이고 졸이셨다. 그냥 고기랑 같이 끓이면 될 걸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게 요리를 하냐는 물음에, 그래야 간장이 너무 짜지 않고 비린내도 나지 않는다며 기왕 해서 보낼 거 제대로 해서 보내야지 않겠냐는 대답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소고기 무국도 마찬가지였다. 따로 육수를 내지 않고 고기만으로 충분히 맛을 낼 수 있는데도 어머니는 파 뿌리와 멸치로 육수를 내어 국을 끓이셨다. 어머니의 수고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철부지에게 전해질까?
철부지는 누구였을까. 젓가락이 무거워… 눈물이 났다. 장조림을 입에 넣고 씹었다. 고기는 부드러웠고 너무 짜지도 않았다. 탱글한 식감의 메추리 알, 입안이 텁텁해질즘 조금 매콤한 꽈리 고추로 깔끔하게 입맛을 잡아내고 하얀 쌀밥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달달한 밥맛이 은은히 번지기 시작할 무렵 시원한 무국을 한 술 떠먹었다. 고깃기름의 감칠맛과 무의 시원함이 어우러져 깔끔하게 입안을 정리해주었다. 심심해진 혀가 다시 즐거움에 놀아날 수 있게 불고기를 양껏 집어 입안에 쑤셔넣었다. 양 볼 가득 고기를 머금고 우걱우걱 짜디짠 눈물이 식사를 망치지 못하게 급히 씹다가 목이 매여 국그릇을 들고 먹먹함을 삼키어도, 뺨을 훑고 떨어져 밥알에 스며드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과분한 식탁, 무능한 나에게 버거운 정성이 가슴께를 시큰하게 저며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이렇게 그때를 상기하며 당신의 사랑을 기록하는 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래, 나는… 그래야 했다.
잊지 말아, 아무것도 아닌 나는 그대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