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자판기 앞에 섰다. 뭘 먹을까. 그래도 땀을 뺐으니 이온 음료를 먹을까, 소화도 안 되는데 탄산음료를 먹을까. 그보다 중요한 건 가격이었다. 운동을 나오기 전에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천 원짜리 지폐 한 장과 삼 백원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1300원… 캔 음료 하나를 먹기엔 충분한 금액이었다. 탄산을 먹으면 지금껏 운동한 게 다 무용지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왕 먹는 거 괜한 스트레스받지 말고 먹고 싶은 걸 먹자고 결단을 내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상하다. 챙겨 온 천 원이 짜리 지폐가 잡히지 않는다. 다른 쪽 주머니도 살폈지만 어디에서도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뛰면서 잃어버린 모양이다. 나는 망연자실하게 음료수의 가격을 살폈다. 300원짜리 음료는… 없었다. 제일 싼 음료조차 500원을 훌쩍 넘겼으니 포기하는 게… 이치 이리라. 언제 없어진지도 모를 걸 찾으러 공원을 다시 돌아봐야 할까?
고작 천 원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이 없어 나의 갈망은 무너졌다. 고작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만약 누군가 발견했다면 주인을 돌려줄 생각은커녕 오늘은 운이 좋다며 근처 편의점에서 간식 하나를 냉큼 사 먹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나를 흔들어 놓는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부모님의 응원에 호기롭게 대학을 그만두며 어떤 차선책도 강구하지 않고 번번이 공모전에 떨어져 작품 하나 내지 못한 허울만 멀쩡한 나였다. 군입대를 앞둔 친척 동생과 회포를 마치고 친척집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용산역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듣기만 했던 껌을 파는 장애인을 만났을 때, 내 지갑엔 돌아가는 기차표를 사기 위한 만 원 지폐뿐이었다. 그분은 한쪽 발이 구부러 굳어진 채로 껌 하나만 도와달라 일정한 음절로 입에 배인 호소를 내뱉고 있었다.
대학가 근처에 있던 과거 한쪽 팔이 없는, 바구니에 인정이 메말라버린 그 날과 달리 몇몇 사람들은 선선히 지갑을 열었다. 천 원, 한 장에 복 받으실 거란 높은 음정의 입에 발린 감사하단 목소리가 역 칸을 광광 울렸다. 그 울림에 나는 움츠러들었다.
저분에게 거스름돈을 달라고 하는 건 구차하니 그냥 만 원을 주는 게... 껌을 됐다고 하고 그냥 만원을 적선하는 게... 그럼 나는 집에 어떻게? 그냥 핸드폰으로 결제해도 되잖아, 그래 그냥... 아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잔돈을 달라고 하거나 만 원어치 껌을 사면...
나의 망설임을 모르는 그는 이미 다른 역 칸으로 넘어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천 원짜리가 그 순간 없었던 것이니 마음 쓸 필요는 없었다. 사람에게 인정을 호소해 노동 없이 얻어낸 소득이었다. 더구나 저런 사람들은 뒤에서 구걸을 강요해 돈을 갈취하는 주먹들이 있기 마련이니, 인정을 베풀지 않는 건... 상념이 이어지는 사이, 나는 용산역에 도착했다.
기차표를 끊으러 가는 걸음걸음마다 당신의 호소가 메아리쳤다. 기차표를 사려 연 지갑에 버젓이 자리한 과묵하신 이황 선생, 그분의 호된 가르침에 또다시, 나는 한없이 한없이 작디작아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놈, 서울 물을 먹더니 어깨가 높아졌다.
전시회를 관람하고 돌아가는 전철에 한 할매가 위태로운 몸을 안전 바에 맡긴다. 할매한테 말 붙이는 사이, 내 자리는 어디가고 모르는 사람이 앉아 있다. 옆자리 친구 놈에게 원망을 터놓자
‘착한 척 하려거든, 혼자 해라.’
역전을 나와 헤매는데 눈에 밟히는 외팔이 사내, 어깨를 까내놓고 무얼 증명하고 싶은 건지 그 앞에 놓인 바구니는 썰렁하기만 하다. 그렇게 몇 번, 외면하고 외면해도 강렬히 맺히는 썰렁한 어깻죽지에 짤랑 거리는 근심 덜어내구서 나는 왜 변명을 하고 있나. 친구 놈 비식 웃으며
‘익숙하면 무뎌진다.’
서울의 카라멜 마끼야또는 쓰구나.
‘서울 사르련?’
농으로 건네는 녀석의 말, 네 좋아하는 거 여 다 있다.
그래도
나는 그런 서울 안 사르련다.
나는 이런 서울 안 사르련다.
몇 년 전이었던가, 아무리 돌아다녀도 지갑을 걱정하지 않았던 때 섰던 시였다.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울하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달빛만 휘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