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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로운 Feb 19. 2024

목표는 관해(寬解)


차의 향이 일상을 이롭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믿음으로 사사로운 차일기를 시작했다. 48개의 주제와 글감을 진작 정해뒀다. 글도 써뒀다.

하지만 인생은 알 수 없다. 내가 차의 향을 사랑하는 일은 평온한 일상과 평안한 감정이 있기에 가능했다. 차를 좋아하는 일로 달랠 수 없는 불안과 슬픔이 존재했다. 사사로운 차일기를 올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


2024년 2월 13일 아빠는 간암 판정을 받았다. 암덩어리가 제법 크다. 종양의 크기는 18cm x 15cm x 17cm. 간의 평균 크기가 25cm인 걸 감안하면 암세포가 간을 뒤덮고 있는 셈이다.


원래 아빠는 아산병원에 갈 생각이 없었다. 받아둔 일감과 생계 걱정 때문에 고향 대학병원에서 항암을 받으려 했다. 내가 아빠에게 큰 병원에 가서 치료 받자고 말했을 때 아빠는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막내는 아빠에게 고향 병원 말고 아산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 받자고 오열했다. 막내는 일이 뭐가 중요하냐고, 돈 벌지 말고 치료부터 받으라고 엉엉 울었다. 펑펑 울던 막내의 솔직함이 부러웠다. 나는 차마 울 수 없었다.


평생 일만 했던 아빠의 인생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우리 아빠는 언제 마음 편히 쉴 수 있을까. 아빠가 늙고 병들었는데 나는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아빠를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력한 자신이 한심했다. 그래서 울 수 없었다. 운다고 돈이 생겨나는 건 아니니까.


2024년 2월 15일 목요일 아빠가 서울에 도착했다. 막내는 아빠를 위해 석촌호수뷰가 멋진 5성급 호텔을 예약했다. 나는 돈이 없어서 딸기우유 두 개랑 크림빵 하나 밖에 못 사줬다. 나중에 나도 돈을 벌면 아산병원과 가까운 올림픽 파크텔을 예약해드리기로 다짐했다.


2024년 2월 16일 금요일 아빠는 아산병원 종양내과 검진을 받았다. 2021년 엄마의 위암 수술 이후 다시 아산병원을 가게 될 줄 몰랐다. 그때는 열심히 회사 다니던 시절이라 아빠가 엄마의 보호자 역할을 하셨다. 코로나 시국이라 병동 밖을 나가면 코로나 검사를 다 해야 하니 아빠는 엄마의 입원 기간 동안 함께 병실에 머무르셨다. 그때 아빠 나이 예순넷이었다.


지금 아빠 나이 예순 일곱. 간암 환자가 되었다. 엄마가 위암 환자였던 시절, 아니 어쩌면 훨씬 전부터 아빠의 간에는  종양세포가 자라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본인 몸이 그런 줄도 모르고 아내 건강만 걱정하던 아빠.


검진 결과,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종괴가 크다며 항암 말고 색전술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 주와 다다음주, 3월까지 추가 검사와 검진이 기다리고 있다. 치료의 방향성은 3월 초 이후 결정될 것이다.


검진 당시 아빠의 간 CT 촬영 사진을 처음 봤다. 새하얗게 뒤덮인 간. 충격이었다. 아빠는 간염을 앓은 적이 없었다. 단, 술은 좋아하셨다. 사업가였던 아빠는 접대를 하다 보니 술을 많이 마실 수밖에 없었다. 주량이 소주 7~8병이었던 한창 시절의 아빠.  늦은 밤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와 화장실 앞에 잠들었던 서른 여덟 살의 아빠.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이번 기회에 술이 더 싫어졌다.


지금 나는 돈이 없지만 시간은 많다. 지난 경험(?)으로 아산병원 지리도 제법 잘 안다. 기록도 잘 하고 필요한 서류도 잘 챙긴다. 나는 내가 아빠의 보호자 역할을 잘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나는 막내처럼 다정하지 않지만 이럴 땐 꼼꼼하고 똑부러지는 큰 딸이니까.


글로 적지 않은 일들이 많다. 숱한 감정이 솟아났다 잠겼다. “위기를 기회로”라는 말이 있다. 이번의 불행이 가족의 결속을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아빠를 챙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부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었으면 좋겠다.


아빠는 용기를 내본다고 했다. 아빠가 이겨냈으면 좋겠다. 우리의 목표는 관해(寬解). 그래, 간암 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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