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끝자락에서
#넓은 세상을 마주하고 싶었다
처음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넌 것은 군 생활을 할 때였다. 다음 이라크 파병에 우리 부대가 뽑힐 것 같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제일 힘들다는 천리행군 훈련을 하면서 곧 부대로 복귀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는 아니었지만 훈련이 끝나고 얼마 뒤, 우리 부대는 정말로 파병에 뽑히게 되었다. 꿈만 같았다. 살면서 쉽게 가볼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겠다고만 하면 갈 수 있는 상황. 가족들의 동의가 필요했지만 난 설득했다. 그리고 먼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8시간 동안 하늘을 가로질러 쿠웨이트에 도착한 다음날 새벽, 다시 2시간 정도 군 비행기를 타고 이라크로 도착했다. 도착 전, 비행기는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곡예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타본 어떤 놀이기구보다 강력했다. 마치 누군가 아래에서 내장을 잡아당기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이런 곡예를 몇 번 더한 후 무사히 착륙했다. 처음 마주한 세상은 너무도 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풍경들. TV에서 봤던 사막은 아니지만 흙먼지가 흩날리는 그런 곳. 먼지와 뜨거운 태양에 얼굴을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라크 아르빌. 임무로 인해 부대 밖을 나갈 일이 많았다. 처음에는 테러범들과 마주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 해져갔다. 외부 활동을 하면서 경험했던 것 중 아직도 몇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길을 지나다 정육점을 본 적이 있다. 제대로 포장도 안 되어 있는 길은 흙먼지를 날리는데 그 옆에서 고기를 그냥 매달아 놓고 판매하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시설이 아직 발달하지 못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여수 택시를 본 적이 있다. 차 위에 한글로 여수 택시가 뚜렷하게 쓰여 있었다. 오래된 중고차들을 해외로 판매한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걸 이라크에서 본 것이다. 파병 생활 초반이라 그저 신기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 우리나라도 전쟁의 아픔을 겪었던 나라이다. 그 당시 미군의 뒤를 쫓아다니며 초콜릿과 먹을 걸 달라고 하던 때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난 이라크 아이들을 통해 똑같이 경험했다. 그런 아이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가깝게 지내며 무엇이라도 하나 챙겨줬었다.
어느새 신기했던 생활들은 익숙함으로 변했고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평생을 부대에 있지 않겠다고 결심한 후, 더 넓은 세상으로 가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았던 우리나라의 모습보다 어려웠던 곳을 경험하고 나니 반대로 더 잘 산다는 나라들은 얼마나 다를지 궁금했다.
일본 도쿄. 지금 돌아보면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하지만 그때는 서울에서 살 때가 아니었기에 복잡한 도시의 모습을 잘 몰랐다. 사람들로 빼곡한 지하철, 길거리에 수많은 사람들, 높게 솟아있는 빌딩들, 서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었다. 그래도 내 기억에 남아있는 건 사람들이었다. 홀로 경주 여행을 갔다가 외국인들이 모여있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이틀을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그때 외국인들에 들었던 말 중에 한국 사람들은 영어 울렁증이 있는지 도움을 청하려 말을 걸면 피한다고 했다. 왠지 알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일본에서는 나 역시 외국인이었다. 기억 속에 너무 넓었던 신주쿠역. 갈 길을 헤매다가 어떤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더니 전철표는 구매를 했는지 챙겨주고 내가 가려던 곳까지 직접 데려다주었다. 이런 일이 한 번은 아니었다. 매일 야경 명소를 찾아갔었는데 역에서 도쿄도청도 그리 가깝지 않았다. 그때도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에게 길을 물었더니 직접 안내를 해주며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도쿄의 느낌은 친절함이었다. 도쿄 여행 책 한 권을 들고 돌아다녔던 나의 첫 해외여행은 나를 더욱 새로운 곳에 대하여 갈망하게 만들었다.
호주 시드니. 군 생활을 마무리한 후, 학교 복학보다는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해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호주에서 2년을 보냈다. 우리나라와는 너무도 다른 환경. 특히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다르게 느껴졌다. 한국은 빨리빨리 문화에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라면 호주는 여유로워 보였다. 시계가 조금 느리게 돌아가도 그리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은행에 돈을 넣어도 바로 찾을 수가 없고, 지정된 인터넷의 용량을 다 쓰면 거의 끊기는 수준의 속도가 한국 사람이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괜찮은 것 같았다. 한국 사람으로서 가장 답답했던 부분이다.
호주의 자연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색이 다르다고 할까. 한국은 산이 많아서 녹색이라면 호주는 맑고 투명한 바다를 흔히 볼 수 있어서 에메랄드빛.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마무리하기 전에 2주간 여행을 하며 유명하다는 도시의 여러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중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모래 섬. 그 섬에는 포장되어 있는 도로가 없었다. 큰 바퀴를 가진 차를 이용해 백사장을 달렸다. 어느 절벽이 있던 포인트, 그곳을 걸어서 올라가며 투명한 바닷속을 구경했다. TV에서만 봤던 가오리, 거북이 그리고 돌고래는 흔하게 마주쳤다. 다 오른 절벽에서 누군가 외쳤다. 그곳에는 거대한 고래가 있었다.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고래의 모습은 웅장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을 아무 말이 없이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그렇게 오랫동안을.
사람의 생김새가 다르듯 각 나라의 모습도 다르다. 그 나라마다의 특색이 있다. 그리고 경제력과 기술력의 차이에 따라 어디는 조금 더 편리한 생활을 하고 어디는 조금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디든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 누군가와 함께 웃고 울기도 하며 살아가는 그런 모습. 태어난 곳의 환경은 내가 정할 수 없지만 어떻게 살아갈지는 내가 정할 수 있지 않을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웃으며 살지. 또는 울면서 살지. 넓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행하다는 착각
한때, 나는 내가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름, 몸을 혹사시키고 목숨을 걸고 버텨냈던 군대. 하지만 내게 남은 건 크게 없었다. 또래보다 일찍 월급을 받으며 독립했기에 통장에 나타난 숫자만을 봤던 것 같다. 아직 대학생 신분이었던 친구들과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4년간의 군 생활을 하면 보통 통장에 찍혀 있다는 숫자를 볼 수 없었다.
친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아빠로 인해 벌어진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라크 파병을 끝내고 돌아온 그때. 그동안 쌓여있던 돈을 건넸다. 그리고 얼마 뒤, 아빠의 부탁으로 가족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군인공제회를 찾아가 넣고 있던 적금을 깨서 다시 한번 아빠를 도왔다. 그렇게 통장의 숫자는 처음과는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 금융위기라는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덕분에 그 당시 유행했던 펀드에 넣어두었던 돈들은 바람에 날아갔다. 15% 수익이 아니라 15%만 남겨두고 사라지는 마법을 보여주었다. 난 그 마법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어느 날 은행에서 전화가 왔다. 연장을 하려면 뭘 해야 한다며 나를 불렀다. 은행 안쪽에 자리 잡은 어느 정도 직급이 있던 분은 나에게 ‘어린 나이에 많이 모아 놓았던 돈이 이렇게 되어서 안타깝지만 억 단위로 넣었는데 천만 원밖에 못 건진 사람들도 있다.’는 위로인지 위로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말을 해주었다. 난 더 이상 은행을 믿을 수 없어서 해약을 하고 허탈하게 돌아왔다. 그 후로 펀드, 주식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의 착각은 정점을 향해 핸들을 틀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엑셀을 더욱 힘차게 밟기 시작했다. 누구는 어디 여행을 다녀왔고, 누구는 부모님이 어디에 집을 해주었고, 누구는 무엇을 했다는 하나하나를 비교했었다. 뉴스를 보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비교는 내 마음에 열등감을 싹 틔웠다. 그 싹은 한동안 무럭무럭 자라났다.
한 학기가 남은 시점에 취업을 하려 서울로 올라왔다. 사회생활의 첫 발을 내딛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볼 기회가 생겼다. 어려움을 극복했다는 사람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하나 둘 알게 되면서 내 마음속에서 자라던 열등감은 부끄러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불행하고 불쌍하다는 나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비해 명함을 내밀 정도가 되지 못했다. ‘고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난 고작 이 정도로 나 자신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나보다 더 힘든 경험을 하고 극복한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삼은 것이 아니다. 그들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열심히 무엇이라도 하려 했다. 생각이 변하니 내 마음도 이전보다 더 편해졌다. 그렇게 나는 변해갔다.
통장의 숫자와 행복이 비례하지는 않는다. 물론 숫자가 높으면 조금 더 편하고 여러 기회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절대는 아닌 것 같다. 종종 뉴스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안 좋은 소식을 접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있는 곳보다 높다는 표현을 사용할 만한 곳에 있는 사람들, 저 아래쪽에 있다는 표현을 사용할 만한 곳에 있는 사람들을 굳이 보면서 비교할 필요가 있을까. 그걸 통해서 얻는 건 없다. 내가 바라봐야 할 것은 ‘나’이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
#담금질과 벼름질
장인은 수많은 담금질과 벼름질로 쇠를 도구로 만들어낸다. 쇠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고온의 용광로에 집어넣었다가 꺼내어 갑자기 물이나 기름 등에 급격하게 냉각시키는 담금질을 하고 나면 온도의 차이 때문에 쇠는 일그러지게 되는데 이때 다시 골고루 펴주는 벼름질을 통해 쇠는 도구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고온의 작업 환경 속에서 수천수만 번의 고된 작업을 통해야만 가능하다. 물론 장인들도 이 과정을 한 번에 터득하지 못했으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자신들이 만들고자 하는 도구를 완성했다. 그리고 작업을 여러 번 한다고 좋은 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과정 중에는 이물질이 들어가기 때문에 반쯤 용해하여 다시 정련 작업을 하고 뽑아낸 쇠를 두드리고 접어서 다시 두드리는 작업을 한다. 이렇게 하면 강한 충격에도 부러지지 않는 튼튼한 쇠가 도구로 만들어진다.
사람도 수많은 담금질과 벼름질을 통해 튼튼하고 성숙한 사람이 된다. 뜨거운 온도의 용광로와 차가운 물속을 오가면서 점점 단단해지고, 일그러진 상태에서 두들겨지고 접히고 다시 두들겨지는 과정을 통해 그 사람의 형태가 만들어지게 된다. 누군가는 그 과정을 버티지 못해 망가지기도 하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 과정을 견뎌내서 훌륭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이런 고된 시기를 겪어보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아마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할 때 불쑥 다시 찾아올 것이다. 지금까지 몇 번의 담금질과 벼름질을 내가 거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앞으로 찾아올 수천수만 번의 담금질과 벼름질을 잘 버텨보려 한다. 더 단단한 내가 되기 위해.
#계획은 그저 방향일 뿐
계획 [명사] : 앞으로 할 일의 절차, 방법, 규모 따위를 미리 헤아려 작정함. 또는 그 내용.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한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아무리 철저한 준비를 한다고 해도 신이 아닌 이상 그 사이에 나타나는 변수들을 모두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계획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준비할 때 언제 무엇을 하고, 어떤 상황에는 이렇게 하고 등 나름 철저하게 준비를 하려 했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워크숍을 준비할 때, 몇 시에 어디서 직원들을 집합하게 하고 언제 어떤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그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누구의 도움을 받고. 이렇게 계획표를 만들어 프로그램, 내용, 준비물, 스텝 등을 준비해서 진행했었다. 평소에도 무언가를 할 때는 비슷한 방법을 하루를 보냈었다. 어제도 오늘은 비가 많이 온다고 하니 숙소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점심은 집 근처 어디에서 밥을 먹고, 옆에 있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서점에서 잠시 구경을 하려는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 어제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지는 않다. 우산을 들고 문밖을 나서며 생각했던 식당으로 걸어갔다. 그리 멀지 않아 금방 도착했다. 근데 문을 닫았다. 쉬는 날도 아니고, 운영한다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래서 나는 숙소로 다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돌아와 잠시 어디에서 점심을 먹을까 검색을 한 후 차를 끌고 다시 이동하였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조용한 카페를 찾아갔지만 그곳도 문이 닫혀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른 카페를 찾아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글을 쓰고 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짜증이 날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내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조용한 곳에서 편안히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무언가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갑자기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근데, 어떻게든 다 처리는 할 수 있더라. 계획한 100가지 중에 어느 정도만 비슷하게 해도 원하는 걸 이룰 수는 있었다. 계획을 객관식으로 생각하여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서술형으로 생각한다면 어떨까 싶다. 중요한 건 내가 바라는 방향대로 흘러가는 것이니까.
#과정의 중요성
3개월용 다이어리를 사용하고 있다. 매일 오늘의 할 일과 그날의 생각, 느낌에 대해 조금씩이라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중간에 스스로 돌아보고 생각하게 해주는 것들이 있어 도움이 많이 된다. 어제, 아래와 같은 질문이 있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기대한 결과를 얻지 못해 과정을 부정한 경험이 있나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요?
질문의 답이 금방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무엇이 있었을까? 최근에 퇴사한 회사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인사업무를 담당할 때의 일이었다. 사내의 인사관리, 조직문화 등이 더 나아지기를 바랐었다. 그래서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하며 적용시켜 개선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소위 조직도 위쪽에 배치되어 있는 사람들은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주장했던 부분들을 하려면 아무래도 그분들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원하던 만큼 개선을 시키지 못했었다. 그 후 많이 아쉬웠고 그때의 내 노력이 가치 없다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생각해보니, 그때 내가 노력했던 과정들을 통해 나의 지식, 스킬, 태도들이 쌓여 한 단계 나를 더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한 방법 등도 추가로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결과를 중요시 한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과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과와 상관없이 그 과정을 통해 내가 분명히 배운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좋은 결과였다면 다음에는 조금 더 개선을 시키면 될 것이고, 안 좋은 결과였다면 반면교사를 삼아 다음에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