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아싸 담임
눈을 떴다. 또 아침이다.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으면서, 아빠가 읽어주는 신문기사를 듣는다. 가방을 챙겨 메고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한다.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가 안 온다. 걸어가기에는 늦다. 어쩌지. 드디어 도착한 마을버스에 몸을 욱여넣는다. 어떻게든 뒤꿈치가 차문에 끼이지 않게 최대한 까치발로 서본다. 학교 후문에 도착했다. 이제 뛰기만 하면 된다. 슬슬 아랫배가 아파온다. 늦으면, 손바닥을 맞는다. 무섭다. 전력을 다해 뛰었다. 하지만,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아, 아. 심장이 터질 것 같다.
1층 현관에 김선홍 돼지새끼가 보인다. 생물 빙그레 썅년도. 아. 망했다.
가슴이 철렁. 발작하듯 두 다리를 쭉 뻗었다. 다행이다. 꿈이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졸업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여전히 학교에 지각하는 꿈은 나의 3대 악몽 중의 하나이다.
물론 나는 아직도 학교에 다닌다. 그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 다시 학교로 돌아온 것은 다름 아닌 '교사'라는 이름을 달고서였다.
교생 때의 아련함을 잊지 못해 나는 결국 학교를 택했다. 4학년 때는 스튜어디스도 꿈꿔 보고, 광고쟁이도 돼볼까 생각했지만, 결국 나는 학교로 돌아왔다. 젤 처음 배정받은 부서가 학생과였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은 완벽했다.
20대 여교사에게 향하는 남학생들의 시선은 나쁘지 않았다. 여학생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알아서 따라오는 남자애들 말고 여학생들을 타깃으로 해야 한다. 다행스럽게 내 전략은 먹혀들어갔다. 젊은 교사를 선호한다는 말은 유치원 꼬맹이들만이 아니었다. 고딩들도 다르지 않았다. 젊음이 권력이었다. 수업마저 즐거웠다.
학교가 괴롭기 시작한 것은 첫 담임을 했던 해였다. 초짜답게 터무니없는 공약을 내세웠고 지키지 못한 약속은 오래가지 않았으며, 나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유값 도난 사건까지 났다. 말 많은 여학생들의 뒷담화와 불만은 나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그 해는 그냥 망했다.
이듬해 맡게 된 반은 시작부터 달랐다. 상냥한 담임은 포기하기로 했다. 첫 시간부터 인상을 구기고 들어가서 두발 길이와 치마 길이를 검사했고, 한 해의 계획과 학급 규율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읊었다. 다른 반 학생들이 이미 담임 시간을 마치고 우리 교실 앞에서 서성이며 떠들어대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강한 첫인상을 주기 위한 일종의 연기였다. 앞문을 힘 있게 열어젖히고는 "야! 이 앞에서 떠들지 말고 다들 꺼져!"라고 소리를 쳤다. 예상대로 교실 안은 고요했다.
그날 이후 아이들 사이에서 나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세상 미친년이 나타났다고.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처음 며칠간은 야자 때마다 남아서 아이들에게 차를 따라줬다. 반 아이들은 고마워하면서도 의아해했다. 이 여자가 왜 이러지, 하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진심은 통하는 법. 내 공포정치 속에서도 아이들이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내 마음을 아이들에게 간파당했다. 그 후부터 아이들은 나를 무서워하면서도 농담도 던졌고, 어느새 스토커를 자처하는 녀석까지 생겨났다. 눈만 감으면 아이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아침에 눈을 떠도 피곤이 느껴지지 않고, 아이들을 보러 가는 출근길이 너무 신이 났다.
매일 우리는 서로를 감동시키는 일과를 보냈다. 칠판 한가득 하트로 가득 메운 포스트잇 메모들부터 다 같이 땅 위에 누워 까만 하늘의 별구경을 했던 체험학습, 2G 폰으로 오고 가는 사랑의 메시지들. 연애를 해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담임 시간에 우리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첫날 그랬던 것처럼 한 명 한 명 포옹해가며 뒷날을 축복해주었다.
그 후에도 담임을 몇 해 했지만, 그 해만큼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비담임을 몇 년 하다가 결혼을 하고 육아휴직을 하고 복직을 하니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 사이, 나는 엄마가 되었고, 학교의 아이들은 '학생 인권 조례'라는 묵직한 갑옷을 입고 학교의 이곳저곳에 충돌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TV에서 보던 연예인들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진한 화장과 짧은 치마, 터질 듯이 꽉 죄는 바지를 입고 긴 머리를 치렁치렁 나풀거리거나 곱슬 파마를 휘날리는 아이들의 모습에 나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지러운 지경이었다. 그렇다. 나는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지 못하는 구시대 교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3년간의 휴직기간 동안 학교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했다.
교무실에서 교사에게 소위 '뻑큐'를 날리며 '씨발'을 외친 사건 하며, 자기 분을 못 이겨 복도에 놓인 소화기를 들고 교사에게 위협을 가한 이야기 하며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장면들이 다름 아닌 우리 학교의 에피소드가 되어있었다. 거기에 여교사 성희롱까지. 이제 더 이상 갑의 위치가 아닌 선생님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다 못해 지하 땅굴을 파고 들어갔다. 이제 보람도 뭣도 없는 그저 '직업교사'였다.
하지만, 사실 학교에서 갑을 누리던 시대의 선생님들은 이미 정년퇴임을 했거나 정년퇴임을 바라보고 있는 세대이지 적어도 우리는 아니었다. 물론 나도 몽둥이를 들고 휘두르던 시절이 있기는 했으나, 아이들과 약속한 범위에서 약속한 만큼만 체벌을 가했고, 체벌 후 아이들과 포옹하거나 하이파이브를 했으며 체벌을 지켜보는 아이들도 박수로 서로를 격려해주었다. 어쨌든 이것도 갑질이라고 한다면야 반박할 자신은 없다. 다만, '갑질 하던 것들이 이제 을이 돼서 잘 버텨보라'는 인터넷 댓글로 교사들은 직업시장의 심판대에 올려져 발가벗기며 난도질해대는 통에 몇 번씩 인격살해를 당하곤 한다. 존경심은 기대도 안 한다. 그저 같은 사람으로 존중만이라도 해주면 좋겠다.
'속수무책'이라는 말의 뜻을 이렇게 심도 있게 곱씹어 본 날들이 있을까.
'속수무책(束手無策)'
손을 묶여 어찌할 방책이 없어 꼼짝 못 하게 된다는 뜻으로, 딱 우리의 상황이다. 우리는 이제 아이들로부터의 공격에 손이 묶인 상태나 마찬가지이다. 혹여 우리가 법적으로 방어를 하게 되면, 이때에는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선생답지 못하다'라고 비난을 받는다. 주로, 학생 시절 '갑질 하던 교사의 손에 자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분풀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못질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나는 다행스럽게 착하고 귀여운 녀석들을 만나서 2년간 즐겁게 수업을 했다. 수업만 했다. 앞으로도 수업만 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착한 선생님만 되면 되니까. 아주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적당히 눈 감으면 된다. 그랬더니 교원평가란에 '선생님 좋아요', '선생님 착해요'가 도배가 되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전과 같은 애정은 더 이상 없다. 지나가는 꼬마 아이를 보며 '아이고, 귀엽네'라고 말할 때의 마음이랑 내 자식과 살을 부비고 부둥켜안고 울고 때론 호되게 혼도 내고 다시 마음 아파하는 정도가 비교가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들이 좋고, 가르치는 게 행복이어서 학교에 붙어있는 건 변함이 없지만 애정의 강도를 따진다면 이전과 비교할 수준이 못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담임을 하게 된다면 상황은 다르다. 수업만 하면 될 때와 아이들과 전면으로 부딪혀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아직 인사 발표가 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겁이 난다. 완전히 트랜스포메이션 된 학교와 학생들에게 아직 부적응 상태인 나는 구시대적 사고를 하는 교사이기 때문이다.
첫 대면의 컨셉은 어떻게 잡고 들어갈까. 경험으로 미루어 첫인상이 1년을 좌우했는데.
수업만 했던 착한 선생님 모드여야 할까. '인격 존중'이라 포장된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관심만으로 너도 나도 편안한 1년이 될 수 있을 텐데. 비록 애정은 전만큼 쏟지 못해도 분란 없는 한 해는 문제없겠지.
아니면 예전처럼 '세상 미친년' 모드? 앞문을 쾅 열고 들어가서 머리 길이와 치마 길이, 화장을 잡아내고 미친 척하고 지도를 시도하는 것이다. 아마 그랬다가는 바로 민원이 들어오겠지. 학교에 그 미친년이 누구냐고. 비록 애정이 담뿍 담겼다 하더라도 공포정치의 외형을 장착해선 더 이상 통하지 않는 환경에서 담임으로 살아남으려면 정답은 착한 담임밖에 없는 건 아닐까.
연구를 해보자.
방학 동안, 학생인권조례에 대해서 심도 있게 읽어보았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동반 성장이라는데, 과연 그 뜻이 옛날처럼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여기에서도 여전히 '그동안 너는 갑이었으니 그 지위 내려놓고 학생과 갑을관계를 벗어나서 지내라'는게 핵심이었다. 그래, 맞지. 학생과 나는 갑을관계는 아니지. 그런데 읽을수록 분명해진 것은 준비나 대책이 없이 미쿡의 선진화되었다는 제도를 한국식으로 바꾸지 않고 급 도입해 놓으니 우리 입맛엔 느끼하고 짜서 맛있게 먹기가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이었다. 결과적으로 갑을관계를 없앤 게 아니라 오히려 갑을관계를 전도시켜 버렸다. 동반성장이 아니라 적당한 무관심으로 눈감아버리면 만사 OK 되는, 결과적으로 서로의 신뢰만 무너뜨린 동반 패배의 상황.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하기에 공부 좀 해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나와 아이들이 같이 성장할 수 있으려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나. 때려도 안 돼, 지도해도 안 돼, 안 된다는 것 투성이라서 아예 시도도 안 하면서 2년을 살아왔더니 '빛 좋은 개살구' 교사가 되어 버렸나 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아이가 되어 생각을 해보자. 지각을 면하기 위해 미친 듯이 내달음치던 악몽처럼 학교는 늘 무서움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의 우리에게 그러했듯, 우리 아이들도 무서움의 대상이었을까. 아무리 편해졌다고 해도 군대는 군대라고 하듯 학교는 학교이지 않았을까. 그런 아이들에게 갑자기 '자유'가 주어졌다. '학생인권조례'라는 이름으로. 정확히 무언 지는 모르겠는데, 편하고 좋기는 하다. 남들도 누리니 나도 같이 누려보자. 어느새 자유가 방종이 되었지만, 선생이라는 자 누구 하나 제대로 알려주려 들지 않는다. 그냥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이고 인권인가 보다.
이번엔 엄마가 되어보자. 심지어 나는 이미 엄마이지 않은가. 엄마가 되고나서 아이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라면 '세상에 귀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는 사실이었다. 내 아이가 나에게 세상의 전부이듯 다른 부모도 마찬가지일테니까. 목숨과도 같이 귀한 나의 아이를 기관에 맡기며 나는 어떤 기대와 바람을 가지게 될까.
잘한 것도 잘못한 것도 부모에게 알려주고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를 이야기해 주면 좋을 것 같다. 때론 어느 선까지 아이를 훈육해야 할지를 미리 상의해도 좋을 것 같다. 우리 아이는 어떤 성향이어서 어떤 것을 주의해주면 좋겠고 어떤 부분은 신경 써서 보아 달라고 부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좋겠다. 아이가 소화할 수 있는 감정선까지 면밀하게 살펴서 대해주면 좋겠다.
아. 역시 학부모의 입장이 되니 바람이 많아졌다. 목숨보다 귀한 존재들이니까. 학부모 모임 때 솔직한 나의 심경을 이야기해보면 부모 입장에서 좀 더 이해를 해주지 않을까.
첫 시간에 아이들과 나눌 이야기의 주제가 가닥이 잡히는 것 같았다.
인권이란 무엇이며, 학생으로서 내가 누려야 할 인권은 무엇이고, 내 권리를 누림으로써 따르는 책임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시간으로 말이다. 인성이 바로 서야 교육이 가능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학교에 관한 꿈을 꾼다. 여고로 근무지를 옮긴 꿈도 꾸고, 학생의 무례한 행동에 울분을 참지 못하는 꿈도 꾸고, 여전히 교사인 신분으로 학생처럼 생활하기도 하고, 갑자기 시험을 보게 되기도 한다. 아마 고민과 스트레스의 방증이겠지.
애들이 열 받게 하면, 그냥 학교 그만둬
라는 남편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나의 가치관대로 해나가 보련다.
비록 '아싸 담임'이 될지라도 말이다.
(*아싸 담임: 아웃사이더 담임, 요샌 이렇게 말하더라. 인싸, 핵인싸, 아싸 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