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살을 먹으며 견디는 일.
(★수술 후 사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혐오감을 느끼실 수 있으니, 원치 않으시는 분은 글을 읽지 말아 주세요.)
동생이 심장수술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말이 심장수술이지, 개흉을 하고 심정지를 한 후 체온을 27도로 낮추고 인공심폐기에 의존해 호흡과 혈액을 공급하며 인공판막을 달고 대동맥도 인공으로 교체를 하는 수술이다. 자칫 잘못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수술이다. '심장이 멎을 뻔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심장은 생명과 직결된 기관이다. 로봇을 이용해서 진행하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수술도 있지만, 동생은 불행하게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허리디스크 때문에 입원해서 심장수술을 하게 될 줄이야. 가족 모두 그야말로 '멘붕'상태가 되었다. 수술 하루 전까지 믿기가 어려웠다. 동생 본인도 '정말', '꼭', 수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극히 멀쩡하게 살다가 하게 된 날벼락같은 수술이었다.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우리 아들이야?
왜 하필 내 남편이야?
왜 하필 내 동생이야?
우리 모두는 이런 생각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의사로부터 수술이 불가피하다라는 말을 처음 들은 날. 우리는 모두 멍한 기분이었다.
꿈이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수술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수록 수술은 현실이 되었다. 게다가 사돈, 즉 동생의 처부모들의 가혹한 언행들까지 더해져 우리 모두는 상처 투성이가 되었다.
각각의 입장에서 두려웠지만 서로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래야 버틸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하지만 지인들의 걱정과 더불어 사돈댁의 거침없는 언행은 우리를 더욱 큰 두려움으로 내몰았다.
수술 날짜를 기다리던 어느 오후.
엄마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심상치 않은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받으셨다. 그리고 거실로 나오셔서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고 애먼 천장만 뚫어져라 바라보셨다.
"앞으로 얘들 어떻게 할거녜..."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사위에 대한 걱정이 아니고, 심장 수술할 아들 걱정에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부모 면전에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제 딸 걱정되는 마음이야 이해 못하는 바 아니지만, 생사를 오갈 수술을 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생략되어 있다.
"이 정도면 사기결혼 아니냐고 하시네."
뭐? 응? 사기결혼? 드라마 대사인 줄 알았다. 부모로서 다른 부모 마음을 저렇게도 할퀴고 생채기 낼 수 있구나. 신기할 정도로 상식 이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눈에는 자기 자식만 있고 남의 자식은 보이지도 않는구나, 싶었다. '사위도 자식인데'라던 그들의 말에 진심의 순도가 0 퍼센트였다는 걸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사위도 자식인데 수술 날 우리도 걱정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날 애를 봐달라니. 정말 새끼들은 키워봤자 지들 생각밖에 못한다니까요. 아무튼 내일 12시 즈음 데리러 갈게요."
올케가 수술 날 가족들 모두 마음이 힘들어 아이들 돌볼 여력이 없을 테니 좀 돌봐주시기를 부탁드렸다고 한다. 걱정되는 마음이야 매한가지이겠지만 직계가족들 만큼은 아닐 터, 그래도 조금 덜 힘들, 지금 생각해보면 티끌만큼의 걱정도 없었을 그들이 돌봐주는 편이 더 낫겠다 싶어 부탁한 거라고 했다. 외손주 돌보는 것이 본업이 된 분들이 많은 요즘, 힘들 때만이라도 도움 요청하는 정도는 당연시 여기는 것에 대한 괘씸함이었을까, 시집일은 그쪽에서 알아서 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사위가 수술하게 된 것이 사돈댁 일이라는 발상 자체가 사위를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대사라니. 아무튼 이런 에피소드로 올케는 친정부모에게 벼락같이 서운함을 호소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 후 사돈댁에서 우리 엄마에게 그런 내용의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엄마는 그간 참아온 울음을 터뜨렸다. 상식 이하의 발언에 신경 쓸 필요 없다며 엄마를 위로하기는 했지만 나 역시 분통이 터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이들을 떠맡게 된 것은 결국 친정부모님과 나였다. 혹시라도 마지막이 될지 모를 수술 당일에 엄마가 안 가보실 수는 없었기에, 아이 셋은 남편과 내가 맡기로 하고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남편은 이를 위해 이틀 연차를 내고 제주에서 날아왔다. 가족이니까.
연차를 쓰기로 이야기가 잘 되었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차 안이었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겨우 참았던 눈물이 결국 터지고 만 것이다.
"엉엉. 아빠도 울고 싶죠?"
아빠는 깊은숨을 내쉬시면서도 괜찮다고 하셨다. 소매로 눈물을 닦고 아무렇지 않은 척 집으로 들어섰다. 엄마 앞에서 운 티를 내면 안 된다. 집안은 울 여유도 없을 만큼 현실적이었다. 세 아이가 뺏고 뺏기며 울고 불고 악을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수술 하루 전날 밤. 아이들이 모두 잠든 고요한 시간에 남편이 도착했다. 불 꺼진 거실 소파에서 멍하니 앞만 응시하고 있는 엄마에게 위로를 건네야 했다.
"엄마.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선천적으로 그런 심장을 타고 나는 사람이 우리나라 인구의 2퍼센트래요. 그냥 운이 좋지 않게 그렇게 되었을 뿐이야. 엄마의 입덧을 없애기 위해 약을 사다 준 아빠도 아들이 이렇게 되기를 바랐을 리 없으니 아빠에 대한 원망도 할 필요 없고, 엄마도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어요."
'죄책감'이라는 단어는 엄마의 급소를 자극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자식이 아플 때 엄마는 본능적으로 자책을 하게 된다는 것을. 심장의 결함은 그 약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이렇게 된 거야."
엄마는 오열하기 시작하셨다. 이왕 울 거면 지금 다 울어내야 낸다. 헤어지는 수술대 앞에서 울면 더 큰일이다. 우리가 여태껏 어떻게 견뎠는데. 수술 당사자의 컨디션도 수술에 한 몫한다.
"엄마, 울고 싶으면 지금 다 울어요. 근데, 내일 병원 가서는 절대 울면 안 돼요. 엄마가 아들한테 용기를 줘야지, 계속 울고 그러면 더 겁주는 거야. 엄마도 알잖아요. 정말 운이 좋았다는 거. 터져서 갔으면 2시간 내에 사망이라잖아.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지금은 수술 잘 되기만 바라고 기도해야지. 당장 생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후유증 걱정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요. 잘 되려고 이렇게 잘 풀리는 거예요. 엄마, 난 하나도 걱정 안 돼. 잘 될 거니까. 의사 선생님도 담담하게 말했잖아."
동생은 정말 운이 좋았다. 수술하게 된 사실만 빼면 정말 이런 행운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이를테면, 허리디스크로 입원해서 심장 건강의 심각성을 알게 된 것, 같은 병원의 심장혈관외과 의사가 세계적 명의라는 것, 그 의사가 한국에 머무는 기간보다는 해외 일정이 더 많은데 마침 그때 귀국해 있다는 것, 긴급환자로 분류되어 입원실 잡으며 지체할 필요 없이 수술이 가능해진 것, 문재인케어의 일환으로 수술이 특례지원 대상이 된 것, 비급여 부분에 대한 실비 청구도 가능해서 실제 수술비의 본인부담이 현저하게 낮아진 것, 의료기술이 세계적 수준이 되었을 때 수술하게 된 점. 등등
우리의 마음만 준비되면 될 일이었다. 오죽하면 간호사 선생님들이 일부러 심장전문병원 찾아보고 온 것 아니냐는 질문을 했을 정도였다. 대기가 길지 않은 허리 병원을 예약하다 보니 정말 어쩌다 가게 된 병원인데 인연이 되려니 운명처럼 이렇게 만나졌나보다 싶었다. 이것도 모두 동생이 가진 복일 것이다. 이렇게 복되었으니 수술은 분명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은 각종 후유증을 언급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쉴드를 쳐두는데 동생의 집도의는 오히려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했다.
" 괜찮아요. 젊은데 뭘. 걱정 허지 마."
의사의 담담함은 환자에게 용기를 준다. 정말 꼭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타 병원 검사도 해보고 결정할 생각이던 동생은 의사를 믿고 가기로 했다. 수술 전날쯤 되자, 동생도 올케도 심장수술 전문가가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그만큼 불안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수술 당일. 간단한 첫 수술을 마치고 두 번째 수술로, 9시 즈음 수술실에 들어가기로 되어있었다. 이른 새벽 남편이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갔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막상 병원에 못 가니 두려웠다.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보내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고모, 아빠는 금방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자! 이제 눈물 닦고 와!"
4살짜리 위로가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
"좋은 의사 선생님의 손길로 깨끗하게 치유되고 후유증도 전혀 남지 않기를. 마음고생하는 가족 모두 위로함 얻기를. 수술 당사자의 컨디션을 조절해주시고 마음 편안하게 수술에 임하고 회복하길 다 같이 기도해요."
단톡방에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8시 40분. 수술실에 들어갔다. 이제 한 시간 정도, 수술을 위한 준비를 한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이○○ 수술(검사, 시술) 준비 중입니다. (08:48~)
메시지로 알려준다. 감사하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이○○님 수술(검사, 시술) 중( 10:15~ )입니다.
드디어 수술이 시작되었다. 수술은 개흉을 해보고 수술 범위를 정한다. 그래서 수술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수술이 길어질수록 복잡하고 범위도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도 '수술 중'이라는 문자는 아직 사고가 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에 안심이 되었다.
중간에 수술에 대해 설명해주신 전공의가 잠시 나와서 수술이 문제없이 잘 진행 중이라고 알려주셨다. 길면 6~7시간 정도 걸리는 수술이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오후 3시 40분. 6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났다. 고생했어, 동생아.
의사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집중력과 체력에 존경심이 들었다. 동생은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가족들은 그 사이 잠시 얼굴을 봤다. 이제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 의식은 보통 24시간 이내로 돌아온다고 들었고, 의식이 돌아오면 통증 때문에 하루정도 잠을 재워둔다고 했다. 힘내, 동생아.
기적과도 같이 동생은 수술 한 시간 만에 의식이 돌아왔다. 정말이지 대단한 의지력이다. 대수술을 하고도 돌아오려고 기를 썼나 보다. '처자식의 무게'라는 것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그날 밤. 동생은 완전하게 의식이 돌아왔고 말도 하게 되어, 이튿날 일반병실로 옮길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정확히 24시간 만에 집안의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끝자락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예정대로 동생은 다음날 일반병실로 옮겼고, 비록 가뿐 숨을 몰아쉬기는 했지만 걸을 수도 있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가래도 뱉고 호흡 연습도 하며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문제는 열이 자꾸 오른다는 것. 그리고 폐에 물이 찼다는 것. 걷기 운동을 하며 기다려보고 그래도 물이 빠지지 않으면 옆구리를 뚫어서 빼내야 한단다. 어려서 기흉 수술을 했던 동생은 그 말에 기겁을 하고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연습을 하고 있는 영상을 보내왔다.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노인들에게마저 추월당하던 걷기 실력이 이제는 우싸인볼트 같아졌다는 올케의 농담처럼 부단한 운동의 결과, 폐는 다행히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열은 잡히지 않았지만 모든 검사 결과 이상은 없다고 하면서, 원하면 퇴원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수술로부터 2주 하고도 이틀째 되는 날. 동생은 드디어 퇴원을 했다. 긍정적인 올케는 지치지 않고 동생을 웃게 했다.
퇴원한 아빠를 만난 아이들의 환호성과 함께 긴긴 병원 생활이 끝났다. 허리디스크로 입원한 지 한 달만이었다. 일주일 정도 엄마네서 머물다가 자기네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엄마의 손길보다 아내의 손길이 편해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회복 중에 있지만 그래도 큰 일은 끝난 셈이니 올해의 아니, 인생의 액땜은 이제 끝났겠지 싶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나를 제일 힘들 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걱정이 온 얼굴을 덮어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아빠를 향해 날 선 말만 내뱉었다.
밤 근무를 하시고도 아들 면회를 하고 돌아오신 아빠에게 엄마는 하는 게 뭐 있다고 피곤하다고 하냐며 짜증을 냈다. 이제 급한 불은 껐으니 가족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건강을 챙기며 잘 지내야 오랜 병간호에도 지치지 않는다. 그런데 엄마는 가족이 아프니 가족 모두가 숙연하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정말 답답했다. 그렇다고 빨리 낫는 것도 아닌데. 자신의 속상한 감정을 하소연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만 예민함으로 무장한 짜증을 받아내는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고 싶지는 않다. 함께 대응해야 말싸움이 될 것을 아는 아빠가 꾹 참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했다. 70을 바라보는 노인이 밤샘 근무 후 병문안까지 하시곤 한 시간이 넘는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것 정도는 수고 축에 끼지도 못한다는 엄마의 논리는 나까지 화가 나게 만들었다. 가족이란 기쁠 때 함께 하고 슬픔을 나눠갖는 사람들인데, 동량의 슬픔을 마치 벌처럼 모두가 이고 있어야 후련한 마음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 해소처는 남편뿐이었다. 나를 제일 괴롭게 만드는 건 엄마라고, 내 정신까지 피폐해져 간다고. 급기야 남편은 지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설령 나는 아파 거동이 힘들어 누워있어도 나로 인해 가족들마저 침체되어 본래대로 지내지 못하는 모습이 싫다고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더 위로가 된다는 사람도 있다고 엄마를 얼렀다.
마치 올가미처럼 내가 슬플 때는 너도 아무것도 하지 말고 슬퍼해야 한다는 생각은 너무 숨이 막혔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면 늘 그랬다. 몸이 약한 엄마는 몸져누워 계시는 날이 많았고, 엄마가 편찮으실 때 우리는 웃음소리도 함부로 내지 못했다. 혹시 놀러 갈 약속이 있어도 취소하고 집에 머물러야 했다. 부모님은 특히 엄마는 그걸 바라셨다.
"엄마가 아프다고 하면 딸년이 집에서 엄마 대신 뭐라도 할 생각을 안 하고 어디를 껴나가 놀려고 하는 거야?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지, 원"
이라며 한심한 사람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그래서, 집안에 누군가 한 명 아픈 날이면(주로 엄마나 동생이었지만) 나는 걱정보다 눈치를 더 많이 살펴야 했다. 물론 그 혜택(?)이 나에게도 동일했고 그때 느껴지는 고마움은 말할 것도 없이 컸지만, 그 후부터 나에게 누구든 '아픈 사람'은 무조건 부담으로 느껴지곤 했다.
이런 엄마의 사고방식이 시간이 흐른다고 변할리 없었다. 다만 그 방향이 함께 사는 유일한 가족인 아빠에게만 향했다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하지만, 엄마가 편찮으시면 자식들보다 걱정을 하시는 것도 아빠이시고, 아들의 수술에 속으로 피눈물 흘렸을 아빠이신데, 겉으로 표 내지 않는 타인의 슬픔은 무가치하게 치부하는 엄마의 나쁜 관습은 어쩐지 잔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빠를 향한 원망에는 두 분만의 히스토리도 분명 존재하지만, 상황을 구분하는 변별력 있는 원망으로 바뀌면 좋겠다.
가족의 건강을 염려하는 일에 있어 또 다른 누군가의 컨디션과 안위까지 살피게 만드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하다. 사랑하는 엄마이지만, 이럴 때는 정말이지 어린아이 같다.
가족이 아프다는 것은 어쩌면 서로의 살을 먹으며 견디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날 선 말로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는 것까지 '헌신'이라고 포장한다면 말이다.
퇴원 일주일 후 동생은 다시 병원을 찾았다. 생명의 은인이라며 집도의 선생님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수줍어하시는 표정 속에 겸손함이 묻어난다.
2019년 2월 21일이 자신의 '두 번째 생일'이라는 동생.
인생 액땜한 너에게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