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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May 23. 2019

엄마가 출장을 가면 벌어지는 일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사실, 학교에서 근무하는 나에게 '출장'이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다. 물론 업무상 타교나 교육청 등으로 출장을 가게 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업무로 집을 떠나 다녀오는 일을 학교에서는 '출장 간다'라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떠올리는 출장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드라마에서 '나 일주일 동안 파리로 출장 가게 되었어'라는 멘트 속의 출장이며, 동시에 일반 직장인들에 대한 나의 막연한 환상이기도 다. 비록 상사를 모시고 가는 비서 형태의 출장이라 할지라도 하드케이스의 캐리어를 끌고 가는 당당한 오피스 레이디를 상상하는지라, 천방지축 아이들을 동행하는 출장에 비해서는 어찌 됐든 부러운 출장이었다. 일반 직장인들에게는 그렇게 일반적인 '출장'이 나에게는 '수학여행단 인솔'이란 이름으로 닥쳐왔다. 2박 3일간 집을 떠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집을 떠난다는 것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아이와 떨어져, 그것도 이틀씩이나 외박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미혼시절 어른 여선생님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집을 떠나는 모든 일에 물개 박수를 치며 환영을 고, 한시라도 더 오래 밖에 머물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런데 나는 왜 그런지  걱정 앞섰다.


서두에서 이야기했지만,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아이와  이틀을 떨어져 지내야 한다. 2~3년 전 남편이 아이와 둘이 시가에 놀러 가 다고 했던 첫날밤, 아이가 나를 찾으며 꺼이꺼이 대성통곡하던 통에 마음이 약해져서 결국 남편이 선사해 준 꿀 같은 휴가를 포기하고, 다음날 시가를 찾았더랬다. 그 후로 처음 이별을 한다. 자다가도 "엄마?"라며 나의 존재와 위치를 확인하는 아이인데 나 없이 잠은 잘 들 수 있을까, 평소처럼 자다가 나를 찾으며 우는 건 아닐까 걱정이 얽힌 실타래처럼 서로 엉겨 붙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아이에게 아빠마저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지내야 하는 상황이다. 사실 엄마 아빠보다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시니 걱정이야 없지만, 막상 아이는 세상 편한 외할머니 할아버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 맡기는 입장에서는 마냥 죄인이 된다. 게다가 할머니 할아버지보다 제 아빠가 살펴 주는 것을 아이도 좋아한다. 주말마다 귀하게 보는 아들이니만큼 눈높이에 맞춰 질적으로 잘 놀아주는 것이 큰 점수를 딴 모양이다. 남편이 같이 지내는 부부라면야 이럴 때 남편이 연차를 쓰거나 조퇴를 해서 아이를 돌보면 되지만, 주말부부인 우리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 아이를 두고 가는 것도 맘에 걸리는데 그나마도 부모님께 아이를 부탁하고 가야 하니 마음이 편할리 없다.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엄마 아빠를 제주로 가시게 해서, 낮 동안엔 여행 삼아 겸이랑 돌아다니시고, 저녁에 퇴근해서 당신이 아이를 케어하는 건 어떨까?"

"나야 그러면 편한데, 부모님이 과연 제주에 오실까?"


남편 예상대로였다. 애랑 굳이 힘들게 제주까지 가서 지낼 이유가 없었다. 이곳에서는 원을 보내고 하원 해서 잘 때까지만 보살피면 되지만, 내 계획대로라면 아침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그것도 사위 집에서 고생을 해야 한다. 하원 해서 잠들 때까지 하실 고생을 상쇄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그럼 당신이 연차를 내고 올 수는 없어?"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3일이나?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상황도 여의치 않고. 목, 금 정도는 고려해 볼게."


남편한테 구걸 후 허락을 받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남편의 회사 상황 상 그런 대답밖에 할 수 없다는 것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하원 후 돌봐주시는 것도 죄송한데 잠들 때까지 고생하시게 하는 건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아."라는 멘트로 마무리했고, 남편도 결국 이틀 연차를 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마침 본사로 출장을 오게 되었다. 노동절 다음날 본사 출장이 잡힌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절 전날 집에 와서 머물다가 본사로 가면 되겠다는 것이 나의 계산이었다. 마침 아이도 노동절이라 등원하지 못해 또 한 번 고민하던 찰나였다. 하지만, 남편의 생각은 나와는 달랐다.  


"그것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닌데, 집에 하루 머무르고 본사로 가게 되면 너무 피곤할 거 같아. 그래서 노동절엔 그냥 여기에서 쉬다가 출장 당일 공항에서 바로 출장을 갈까 고민 중이야. 물론 아직 결정한 것은 아니고. 그리고... 가더라도 출장 전날 미리 본사 가서 인천서 지내던 동료들 얼굴들 볼까 싶기도 하고..."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피곤? 피곤해서? 차라리 듣지 않았다면 좋았을 말이다. 당장 나는 출장을 가야 하고 날짜나 일정을 전혀 조율할 수 없다. 그 상황에서 그 고생을 고스란히 친정부모님들이 떠맡아야 하는데 당신은 피곤해서, 라니? 배부른 소리처럼 들렸다.


이곳에선 매사가, 일상이 '선택의 여지'가 없다. 조건이 정해지면 그에 따른 해결책은 늘 하나이다. 하지만, 남편은 '피곤'을 이유로 하루를 쉬고 싶다는 말을 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아이를 키우는데 왜 한쪽에만 선택권이 있는 걸까.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노동절 어차피 주중이라 못 온다고 생각했었고, 쉴 수 있어서 좋겠다고 부럽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다음날 출장이라 본가에 올 수 있는 여건인데도 불구하고, 이동이 많이 피곤할 것 같아 고민 중이라는 말 이쪽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배려 ZERO' 발언으로 들렸다. 돈도 없어 쫄쫄 굶는 사람 앞에서 생각 없이 반찬투정을 늘어놓는 사람처럼 말이다.


내가 야자감독을 하게 되거나 이번 같은 출장으로 인해서 부모님이 케어하는 시간이 무한대가 될 때, 그럼에도 불가피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겨우 겨우 서로 땜질하며 보내는데, 남편은 자기 몸이 편한 쪽을 선택한다는 게 어쩐지 이기적이게 느껴진 것이다. 남편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상황에서 자기 편의를 위해 고민을 하고, 이쪽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어 상황 그대로를 누군가의 희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는 생각에 울컥해왔다.


물론 그날 하루 온다고 해도 대단하게 서로의 수고를 덜어주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자주 못 보는 아들 얼굴 조금이라도 한 번 더 보고, 하루 더 놀아줄 수 있는 기회인 것은 분명했다. 출장이 없었다면 어차피 못 오는 거니까 그냥 본래의 생활대로 지내면 되었던 것이지만, 알게 된 이상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나도 힘드니 남편도 힘들어야지 하는 심보는 아니었다. 오랫동안 못 봤던 동료들 얼굴을 하루 일찍 가서 볼까 하는 생각은 했어도, 아이랑 놀아줄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은 기분, 그리고 그들과 저녁같이 먹으려면 어차피 일찍 가야 하는데 굳이 고생해서 본가에 올 필요 있을까 했던 남편의 생각들이 너무 서운했다. 차라리 못 온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싶었다. 결정 난 게 아니라고 했지만, 결정과 무관하게 남편의 생각을 알아버린 것이 참 씁쓸했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일까, 엄마와 아빠의 차이일까, 주양육자와 보조 양육자의 차이일까. 어떻게 생각해보아도 괜한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날 밤 남편에게 나의 마음을 메시지로 보냈다. 남편은 답이 없었다.



남편은 노동절 전날 본가에 왔고, 아이와 놀아주다 동료들을 만나기 위해 본사로 갔다. 그것만으로도 아이의 낮시간은 해결되었다. 그리고 주말을 보낸 후 다시 제주로 돌아갔다가 며칠 후 다시 본가로 왔다. 이번엔 새로운 해결책을 들고서.


"겸이 데리고 대전에 다녀올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남편이 훌륭한 아이디어를 냈다. 결혼한 후 처음 있는 일이다. 아이와 시가에 가면 시어른들은 오랜만에 아들과 손자 얼굴을 보게 되니 좋고, 친정부모님은 아이로부터 해방되니 좋고, 남편은 자기 본가에 오랜만에 가 효도하니 좋고, 아이는 시골 마당에서 놀게 되니 좋고, 출장 가는 나는 마음이 편해서 좋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떠나게 된 수학여행.


막상 떠나니 생각보다 이쪽 생각이 덜 났다. 첫날밤 아이는 "엄마는 못 오니까 그냥 할머니 할아버지와 잘래요."라고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잘 잤다고 하셨다. 다음 날 아빠와 함께 시가를 찾았던 아이는 그날 역시, 예전의 어린 날처럼 엄마를 찾으며 대성통곡하지 않고 "내일이면 엄마를 보니까 괜찮아요."라며 잘 잤다고 했다. 아이가 성장한 것이다. 엄마 마음만 제자리였던 것이고.


긴 걱정 끝 출장은 무사히 끝이 났다. 돌아오는 기차역에서 아이를 만나 집으로 오는데 아이의 얼굴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매주 남편이 와서 아이를 대하는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을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고작 이틀 못 봤을 뿐인데 어쩜 그리도 애틋한지. 아이가 숨만 쉬어도 뽀뽀 세례가 절로 나간다.


엄마가 출장을 간다 해도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괜한 걱정으로 뾰족하게 지냈던 시간이 무안해질 정도였다.  


주말부부라는 조건이 핸디캡인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을 내 삶의 불편의 주된 이유로만 여기면 내 마음만 가난해지는 것 같다. 일은 닥치면 어떻게든 해결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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