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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May 27. 2019

제주 사는 남편, 육지 사는 아내



사람들이 모이면 어김없이 나의 주말부부 생활과 남편의 제주살이가 화두에 오른다. 주말부부 하려면 힘들겠다로 시작해서 그래도 제주라서 좋겠다로 끝난다. 나 역시 어차피 주말 가족으로 살게 된 거니 이왕이면 제주라 낫다고 말할 수 있을 때가 있다. 바로 방학이다. 내가 제주로 넘어갈 수 있는.


그 무렵 남편 매일같 야근을 했다. 평소에 6시 퇴근을 잘 지키 남편은, 그 무렵 새벽 1~2시 귀가가 기본이었다. 가끔씩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 남은 업무를 하고 오기도 했고,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은 날에는 논스톱으로 새벽까지 일하기도 했다. 나는 꾸벅거리며 남편을 기다리다가도 12시가 넘으면 이내 체념하고 먼저 잠든 날이 더 많았다.


아침에 겨우 눈을 비비고 배웅을 하면 그것이 '그날 마지막으로 본 남편의 모습'인 날이 연속되었다. 처음에는 안쓰러웠는데 나중에는 슬며시 불만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차라리 육지에서 떨어져 지내면야 몇 시에 들어와서 몇 시에 나가든 이미 우리 가족 공동의 스케줄이 아니니 상관없지만, 같이 지내다 보니 함께 해야 할 남편이 없단 사실이 점차 버티기가 힘들어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차라리 주말부부였더라면 지금 이 시간 어차피 못 볼 얼굴인데, 함께 지내게 되니 얼굴을 못 보고 지내는 것이 어찌나 억울하던지. 남편의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뾰로통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괜찮다고 말하기엔 안 괜찮은 얼굴이 먼저 남편을 대하고 있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다시 육지로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주말부부를 하면서 서로에게 더 마음이 너그러워졌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같이 참여해야 할 일에 파트너가 빠지는 상황은 불합리하다고 여기지만, 애초에 혼자 할 일이었다면 같은 분량의 일이라도 군말 없이 기꺼이 한다. 떨어져 살면 남편이 몇 시에 들어오건 그의 일이다. 하지만, 함께 지내면 남편이 퇴근하는 시간은 매우 중요해진다.


아이 역시 아빠와 함께 지내러 왔는데 아빠 없는 삶은 육지에서보다 단조롭다. 등원하지 않고 엄마와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어야 하는 삶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같은 조건을 살아도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은 결국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해 준 시간이었다.




제주는 여름과 다르게, 아니 여름보다 더, 겨울 날씨 우울하다. 일주일에 많으면 이틀, 보통은 하루정도 빛이 난다. 뿐만 아니라 습도마저 엄청 높다. 체감상으로는 여름이 더 습하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볕이 드문 겨울이 빨래도 더 안 마른다.


그 겨울은 더욱 그랬다. 날이 음산하니 남편도 매일 차를 가지고 출근했고, 차 없이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차를 두고 간들 흐린 날씨에 어딘가 향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람을 움츠리게 만드는 건 기온(氣溫)이 아니라 기상(氣象)인 것 같다. 바람이 제법 제주에서는 뺨을 에이는 바람이 부는 날이 최고로 무서운데, 바람이 세게 불어도 날씨가 쾌청하면 나가보고 싶은 마음 정도는 일게 된다. 하지만, 기온이 높아도 흐린 날씨면 어쩐지 주저앉게 된다. 차라리 비라도 시원하게 쏟아지면 모를까.


우울한 날들이 며칠 이상 계속되면 더 이상 이렇게는 못살겠다 싶어 진다. 그때쯤, 화사한 봄이 온다.  



봄에 방문한 제주는 삶의 터전일 때와 다르게 느껴졌다. 치 여행 같았다. 작년에 비해 미세먼지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시선을 두는 곳마다 노란 유채가 흐드러졌고, 연분홍 벚꽃이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땅은 유채요, 하늘은 벚꽃 천국인 계절이 오고야 만 것이다.



제주 사람들은 1시간 거리가 넘어가면 먼 곳이라고 느낀다. 전에는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동분서주 움직여가며 제주를 보았지만, 우리 역시 이제 더는 그러지 못한다. 한 곳을 보더라도 제대로 보고 싶고 이동시간은 최대한 줄이고 싶다. 그런 남편도 오랜만에 방문한 우리 모자를 위해 여행을 계획했다.



제주시에 위치한 우리 집을 두고, 서귀포로 거처를 잡았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꽃. 2년 만에 다시 찾은 녹산로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차에서 잠든 아이를 기어이 흔들어 깨워 예쁜 꽃 좀 보라고 설득했다. 어리둥절해하던 아이도 화사한 제주 봄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 진다.



오랜만에 찾은 강정마을도 전보다 평화로워졌다. 시위 끝에 이미 내어주고만 해군기지가 조화롭지는 않았지만, 삼보일배를 하는 마을 주민들도 해군기지 반대를 위한 천막들도 이미 사라지고 고요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남편과의 첫 제주여행의 추억이 깃든 산방산도 아이와 함께 찾으니 모든 것이 새롭다. 부처의 모습을 흉내 내는 아이의 모습이 익살스러웠. 또한 산방굴사에서 내려다본 사계 바다는 산토리니를 연상시다. 송악산에서 내려다본 모습과 또 다르다. 어느 계절에 가도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바람을 피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일상이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여행의 맛이 있었다.





물론 제주에서였기 때문에 더 극적으로 느껴진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거지에서도 역시 오랜만에 는 남편과의 외출은, 집 앞 공원만 해도 여행 같다. 늘 오가던 길도 '완전체가 되어' 함께 가니 그날 하루 무언가 성취한 것 같고 특별한 맛이 존재했다. 주말부부가 아니었더라면 못 느꼈을, 아니 눈치채지 못했을 행복이다. 제주에서든 본거지에서든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일상이 되어 눈치 못 채고 흘려버리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주말부부라는 핸디캡은 때로는 이렇게 좋은 감정도 선사해준다. 그래서 인생사를 동전의 앞뒷면에 비유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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