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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May 29. 2019

이게 다 남편 때문이다.



"딸, 퇴근하고 1시간만이라도 운동을 해."


퇴근해서 핸드백을 내려놓는 내게 엄마가 대뜸 던진 말이다.


"엥? 왜요? 왜 갑자기?"

"우리가 한 시간 더 봐줄 테니까 운동해."

"그러니까, 왜 갑자기?"

"아빠가, 오늘 보니 너 살이 많이 쪘다더라. 나이 먹고 살까지 쪄서 아플까 걱정 이래."


끄응. 오늘 흰 원피스를 입었더니 더 둔해 보였나. 매일 딸을 보는 아빠가 갑자기 살이 쪘단 말을 하시니 웃음도 나고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 인생 최절정 몸무게를 자랑하던 고3 때도 못 들었던 말이다. 무뚝뚝 하셔서인지 예쁘다느니 살이 쪘다느니 딸의 외모에 대해 일절 왈가왈부하시는 분이 아닌데, 마흔 넘은 딸이 살찐 것이 오늘 두 분의 화제가 되었다니 묘하기도 웃기기도 했던 것이다. 뭐 어쨌거나 이야기의 요지는 살이 쪄서 못나거나 예쁘다거나 그런 류의 평가가 아닌 건강 걱정이셨고, 그러고 나서 생각하니 나도 나이가 든 게 분명했다.


그렇잖아도 며칠 전 학교에서 인바디 검사 결과를 보고 생각이 많아진 터였다. 다행스럽게도 근육량은 적정 수준인데 체지방 이 녀석이 문제였다. 빼야 할 체지방량과 줄여야 할 체중이 같았다. 푸하하. 일 년 전 제주에서 플라잉 요가를 시작할 무렵 체크했던 상태와 또 달랐다. 그때는 근육량 부족에 체지방 과다였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체중이 불어났고 근육량은 적정 수준이 되었다.



'먹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것'이 최고 장점이던 임신 시절 이후로 겁 없이 먹어오긴 했다. 뱃속 아이를 키워야 하니까, 젖을 먹이려면 엄마가 먹어야 하니까, 밤낮으로 애를 돌보려면 체력이 필요하니까, 어차피 찐 살 지금 덜 먹는다고 굉장히 빠지는 건 아니니까, 갖은 핑계와 이유들로 먹는 행위를 정당화시키며 먹었다. 먹기만 했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미련만 갖는 옷들이 늘어났다. 그래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수업을 위해 4층 계단을 오르는 것이 숨이 차고 버거운 날들이 반복되자 몸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 운동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그 찰나 인바디를 했고, 그 찰나 엄마의 운동 권유를 받게 된 것이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옷을 벗었다. 원피스를 벗고 스타킹을 벗고 브라를 벗고 거실을 활보하다 엄마 옆 소파에 던져지듯 앉았다. 팬티 바람이다.


"오늘 출근하다 생각했는데 엄마랑 자식이 제일 편한 사이인 거 같아."


그 동시에 방귀가 뽕, 하고 터져 나왔다.


"엄마 앞에서나 겸이 앞에서는 이렇게 팬티바람으로 돌아다닐 수도 있고, 지금처럼 방귀도 편하게 뀌는데 남편 앞에선 그럴 수가 없잖아. 아무리 남편이 편해도 엄마랑 자식만큼은 아닌 거 같아. 와이프가 맨몸으로 집안을 돌아다니면 어떤 남편이 계속 설레며 사랑할 수 있겠어. 더는 신비감이 없다며 투덜거릴지도 모르지. 그치만 엄마한테는 흠 잡힐 걱정도 없으니 젤로 편하지 뭐야."


남편과 나는 아직 방귀를 트지 않았다.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수로 터진 것은 "이게 뭔 소리야?"라며 서로 웃고 넘기거나 아이에게 뒤집어 씌우며 넘기긴 하지만, 내 방귀소리를 듣거라, 라는 식으로 대놓고 푸앙 내뿜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남편이 대단하게 불편한 사람은 아니다. 엄마는 극구 말리지만 노브라로 집안을 활보해도(물론 겉옷은 장착) 남편은 개의치 않는다. 브라가 얼마나 몸을 옥죄는지 그리고 노브라가 얼마나 건강에 이로운지 알기 때문이다.


대놓고 코를 파거나 자랑하듯 방귀를 뀌는 등 다소 더러운(?) 행위가 아닌 이상 서로에게 내추럴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가? 남편은 나의 자조적인 '셀프 디스'에도 굳이 부정을 하며 내 기를 살려주는 편이다. 


"일어나 보니 전인권이 앉아 있었어."

"내 팔 좀 봐. 잉잉. 완전 아줌마야."

"나 이제 허리가 없어지나 봐."


어떻게 말해도 남편은 마치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에이~ 아니야"라든지 "무슨 소리야~"라고 대답한다. 마음이 놓이고 기분도 좋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을 때, 혹시 나의 표정을 훔쳐보았을까.


그렇다.


내가 살찐 건 남편 때문이었다. 아이를 낳고 살이 안 빠질 때도 원래 그런 거라며 괜찮다고 했었다. 복직을 하며 몸에 맞는 외출복을 사러 갔을 때도 다 잘 어울린다며 물개 박수를 쳤다. 퇴근한 나를 보며 "우리 색시, 학교 다닐 땐 왜 이렇게 예쁘게 꾸미고 다니는 거야"라며 차려입은 나를 칭찬했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 맨얼굴을 보며 한숨 쉬는 내게 "화장한 거랑 차이가 안 나는 피부야"라며 나의 푸념을 원천 봉쇄했다. 팔뚝이 남편과 비슷하다는 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남편뿐만이 아니다. 여섯 살 아들도 거들었다.


"겸아. 저 누나 너무 예쁘지 않아?"


너도 나중에 저렇게 참한 아가씨를 데려오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물어보면,


"아니! 난 엄마가 더 예쁜데?"


라고 대답한다.


"그래, 엄마가 제일 예쁘지만 저 누나도 예쁘지 않냐고 물어보는 거야."


"난 모르겠는데?"


이런 대화가 늘 이어졌다. 자식에게 외모 평가하는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가끔 너무 예쁘면 옆사람의 공감을 구하며 함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싶어 진다. 그게 아들인 이 실수이지만.


"엄마 공쥬~"

"엄마, 난 세상에서 엄마 피부가 제일 보드라워."

"엄마에게서 나는 향기가 나는 너무 좋아."

"우주의 금성과 별빛과 태양을 다 합쳐도 내가 엄마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못할 걸? 내 사랑 우주에서 지구를 뚫고 나갈 만큼이야."


아들의 이런 사랑 고백을 들은 엄마가 어찌 자신의 외모를 불평할 틈이 있단 말인가. 연애할 때를 돌이켜보면 사랑받고 있을 때의 내 얼굴이 가장 예뻐 보인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사랑받는 사람은 자존감만큼이나 외모에 대한 만족도 높으니까 말이다. 정확히는 외모에 대한 불만이 낮아지는 것일 테고.


분명 애들은 투명하다고 했다. 그래서 믿지 말아야지, 하며 믿었다.



아무튼 우리 집 두 남자들 때문에 나는 살찌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고 살았다. 괜찮다, 예쁘다, 라는 최면에 걸려 진짜 괜찮을 줄 알고 지낸 것이다.


그것을 아빠가, 그리고 엄마가 깨우쳐 주셨다. 그리곤 주말부부라 평소 아이 때문에 운동을 못하는 사정까지 헤아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내 딸이 살쪄 못나 보이는 게 걱정이신 게 아니라, 오롯이 건강 때문이다.


매일 보면 잘 모른다던데 아빠는 아셨다. 가끔씩 보는 남편이 몰랐을 리 없는데 괜찮다고 했다. 이제 두 남자의 마수에서 벗어나 더 이상 공주가 아님을, '골골 아짐'이 현실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마터면 계속 최면 걸려 살 뻔했다. 휴~


현실 직시. 운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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