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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Jun 24. 2019

주말부부에게 저녁 약속이란



퇴근을 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갔다. 낮동안 흘린 땀으로 혹여나 몸에 냄새가 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기분 좋은 장미향 바디워시로 몸을 씻고 시원한 바람에 머리와 몸을 말리고는 고데기로 컬까지 살려주니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출근 때 생략던 아이라인도 그려보고 얼굴의 생기를 위해 볼에 블러셔도 얹어본다.


'이 정도면 실망하지 않으려나?'

'늙었다고 생각하면 어떠지?'


온갖 잡념들을 내쫓듯 도리질을 쳐본다. 예전 같지 않다. 어떻게 꾸며도. 렇지만, 세월은 거슬러갈 수 없다더니 당신도 마찬가지이구나, 같은 류의 평가를 받고 싶는 않다.


도대체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인가. 멀리로 꽃을 들고 있는 그가 보였다.




"야! 남편 좀 그만 볶아라. 회식 때문에 늦는 거로 쥐 잡듯 잡냐."


철없던 시절의 내 대사이다. 결혼 전, 기혼인 친구가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은 '회식'이라는 이름의 저녁 약속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목이었다. 사회생활을 안 해본 것도 아니고 회식이라는 공식행사에 빠지는 것이 눈치 보이는 일임을, 무르익은 분위기에서 슬쩍 나오는 것이 화투판 밑장 빼기보다 힘든 일임을 모를 리 없는 친구였다. 회사(會社), 란 자고로 '모여서' 일하는 곳 아니던가.


뿐만 아니다. 또 다른 기혼자 친구는 퇴근하고 만나자는 제안에 줄곧 "미안. 남편이 혼자 식사해서... "라는 대답을 했다. 애도 아니고 혼자 밥 한 끼 먹으면 좀 어때서. 결혼하면 애랑 남편 뒷바라지에 자기 자신은 없어진다더니, 과연 그 말대로 행동하는 친구들이 바보처럼 여겨졌다.




"미안. 갑자기 총무팀장이 꼭 와야 한대서. 미안"


총무팀장이라는 작자는 가정도 없어? 왜 갑자기 회식을 만들어서는 한밤까지 독박 육아하게 만드는 건데!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야 상대의 처지를 제대로 헤아리기는 어렵다.


그 시절의 내가 그랬고, 겪고 나서야 뒤늦은 '아~!'를 연발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커피 CF에서는 후배이지만 그리고 추측컨대 미혼이지만, 당당하게 '회식 NO', '먼저 가보겠습니다'를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사이다 같다고 여기면서도 우리 세대에서도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는 한다. 상사에게 회식을 거부하는 이유를 요목조목 대기도 어려울뿐더러, 후배의 당당한 거부사유 유연하게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아휴직을 하고 밤낮으로 아이를 돌봐야 하는 입장에서 남편의 회식은 반가울 리가 없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말과 달리, 리로도 마음으로도 이해가 어렵다.



나를 위해 집 근처까지 와주기까지 한 그가 근처 레스토랑까지 예약했다. 우리 집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게 근사한 곳이었다. 선물 받은 꽃다발을 품에 안고 멋쩍게 자리에 앉았다. 취향을 묻고는 알아서 주문도 참 잘한다. 역시 옛사랑답다.


남편 몰래 옛남자를 만났느냐고? 그럴 기운이라도 남았으면 좋지만 열정이 전 같지 못한 건 비단 요즘만의 일이 아니다.


11년 전, 그러니까 열렬히 아끼던 제자 녀석들이다.


"선생님~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어쩜 이래요. 저희만 늙었어요."


휴우. 다행이다.  옛 남자를 만나도 이렇게 잘 보이려고 준비를 했을까. 성공이다.


"말로만 듣던 겸이를 이렇게 실제 보다니! 꼬꼬마인 줄 알았는데 어린이인데요? 잘 생겼다아~!"



그렇다. 오랜만에 만나는 제자들과의 저녁 만남에 아이를 동반한 것이다. 바로 이게 요즘 내 처지다.


남편과 함께 지낼 때는 그래도 이런 스케줄이 생면 퇴근 후 아이를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모님께 신세를 져야 한다. 낮동안에도 그랬는데 더 그러기엔 면목이 없다. 게다가 일도 아니고 개인 일정 아닌가.


엄마야 두고 가라 하셨지만 이번엔 아이가 용납하지 않는다. 기필코 엄마를 따라나서겠단다. 혹시 달고 나갈지도 모른다고 예고는 했지만 로또 당첨이 이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이웃집 토토로>를 보면 언니 사츠키의 학교에 기필코 찾아간 메이가 언니의 짝꿍 사이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목청껏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운 그 장면에 우리 아이가 오버랩된다. 상황상 민폐이기는 하나 모두가 익스큐즈 해주는 그런 장면이 아주 흡사하다.



미안하고 고맙게도 제자들은 기꺼이 아이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답해준다. 유치원 교사인 한 명이 우리 아이를 마크하는 동안 나머지 한 명과 대화를 나누며 잃어버린 우리들 사이의 시간을 다시 메꿔갔다.


이 제자들을 옛사랑처럼 묘사했던 다른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스승의 날 즈음해서 내 앞으로 예쁜 꽃차가 배송되었다. 주문자 이름은 없는 상태라 업체에 확인을 요청했고 거기에서 제자들 이름을 듣게 되었다. 바로 전화를 걸어 고마움을 표시했더니 "서프라이즈로 찾아뵈려다 반장이랑 스케줄이 안 맞아서 택배로 보냈어요. 예전에 선생님이 야자시간에 저희에게 차 한잔씩 따라주시고 그랬잖아요. 그 생각이 나서..."라고 대답해왔다. 선물이 더 뜻깊어지는 순간이다. 내가 건넨 사랑의 표시를 오래오래 기억하 나중에 돌려주는 사랑.



시간은 정처 없이 흘렀다. 이윽고 아이가 하품을 한다. 잘 간이 다가온 것이다. 서로의 퇴근시간에 맞추다 보니 느지막이 만나기도 했지만 비워진 시간을 이야기로 채우느라 더 빠르게 지나갔다.


남편이라도 있었다면 오랜만의 이 만남을 기념하며 술이라도 기울일 텐데 조금이라도 더 제자들의 청춘에 대해 물어보고 귀 기울일 수 있었을 텐데. 마냥 아쉬운 밤이었다.




결혼을 하면 내 시간이 오롯이 내 시간만 일 수 없다. 혼자 밥 먹게 될 짝꿍이 안쓰러워 불가피한 모임이 아니면 저녁 약속은 잡지 않는다. 불가피할 경우에라도 사전에 미리 알리는 게 에티켓이다.


이때 아이까지 생기면 저녁시간을 나만 위해 쓰는 것이 더 미안해진다. 그래서 운동도 여가생활도 물 건너간다.


한 단계 더. 주말부부를 하면 저녁 약속은 거의 불가능하다. 번처럼 아이를 동반하거나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는 한 어렵다. 심지어 야자 감독하는 날 교무실에 앉히고 아이에게 노트북을 쥐어주며 근무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떨어져 있는 남편은 상대적으로 저녁시간이 자유롭다. 그래서 주말부부 생활을 하는 남편들을 보 '전생에 나라를 구 것없다'는 부러움 섞인 농담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말부부가 되기 이전에 충분히 남편 찬스를 쓰 않은 것이 후회로 남을 뿐.

(예비 주말부부 여러분. 쓸 수 있는 모든 찬스를 미리 사용하세요. 가불도 하세요. 속닥속닥)


제자들아. 고맙다. 청춘들의 소중한 저녁시간을 나를 위해 내어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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