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eaterrace Mar 25. 2019

둘째, 안 낳아요?

키워주실 건가요?



퇴근 즈음해서 전화가 왔다.


"엄마~ 겸이 동생 낳아주는 대신에 나도 사랑해줘야 해요."


아이로부터,였다. 올해 나이 6살.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동생을 낳아달라는 부탁을 해본 적이 없는 아이이다. 뜬금없는 전화에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기는 했지만, 녀석의 마음에 어떤 심경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궁금하기는 했다.


아이를 출산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의 꿈은 두 아이의 엄마였다. 휴직과 동시에 '6년을 내리 쉬어야지' 하는 결심을 했지만, 출산의 고통과 그 후 겪어했던 많은 어려움이 내 평생 꿈꿔오던 '두 아이 엄마'를 내려놓게 했다.


첫 입덧 이후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입맛은 삶의 즐거움 하나를 내려놓게 했고, 무통주사가 전혀 듣지 않아 8시간 동안 촉진제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차라리 빨리 내 배를 째고 아이를 꺼내라'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리고 첫 출산이다 보니 간호사의 '힘주세요!'라는 말에 방법을 몰라 '응가'하는 것처럼 항문에 '있는 힘, 없는 힘' 다 모아 줬더니 출산 후 어마어마한 항문통에 시달려야 했다. 아픈 곳이 한 곳 더 추가되었더니 두려운 나머지 모든 배변활동을 하지 못했다. 소변이 마려운데 힘을 줄 수 없었고, 뱃속이 묵직한데도 일주일을 넘게 해결을 못했다. 분명 출산 선배들은 '무통 천국, 조리원 천국'이라고 했는데 나는 도무지 뭐가 천국인지 알지 못했다.


잠이 부족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팅팅 불은 젖을 유축하느라 손목이 제정상인 날들이 없었고, 말하지 않으면 눈치껏 돕지 못하는 남편 때문에 점점 원망만 쌓아갔다. 집은 엉망이었고, 그 보다 더 엉망이 된 것은 내 육신과 영혼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는 사람이구나,를 처음 깨달았다. 그때 결심했다.


나에게 둘째는 없다.


남편이 도와주지 않는다며 온갖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금세 둘째를 임신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의아했다. 출산의 고통도 남편과의 불화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는데, 나는 왜 그토록 선명한 것인지 도무지 그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개는 이러했다. 남편 좋아 낳나? 큰 애 가여워 낳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혹시 아이에게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를 생각해보기는 했었다. 하지만, 결론은 남편과의 불화를 감내하면서까지, 그리고 그 불화의 분위기 속에 아이를 키우면서까지 둘째를 갖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도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죽도록 싸우고, 연락두절의 가출까지 감행하면서 이혼까지 생각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이 아이 하나로 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동생을 원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사촌동생이 자주 오면서 본인이 감내해야 할 것들을 너무 빨리 경험한 탓이었고, 두 번째는 자신의 사랑을 누군가와 나눌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들이지만 감성이 풍부하고 오감이 예민한 아이라, 부모의 표정 변화 하나까지 눈치채고 신경을 쓰는 아이에게 동생은 너무 큰 스트레스일 것이다. 때리고 뺏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양보하고 속으로 끙끙 댈 녀석임을 알기에 아이의 행복한 성장을 위해, 그리고 내 영육 간 건강을 위해 둘째 생각은 진즉에 접어버렸다.


이유를 알리 없는 남편은 약속과 다르다며 항의했지만, 나는 아이의 행복과 내 건강을 위해서 더는 어렵겠다고 했다. 아이와 내가 적어도 밤잠은 설치지 않게 된 시기부터는 나도 슬슬 예민함을 덜, 남편과의 불화도 점점 줄었다. 그 불편한 과정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 물론 남편과 나 모두 처음 하는 엄마 아빠, 그리고 처음 하는 남편 아내였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는 않다.





우리의 이런 결정에 양가 부모님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우선 친정부모님은 낳을 거면 더 나이 들기 전에 얼른 낳으라고 하셨다. 더는 생각이 없다는 나의 말에, 역시 친정엄마는 '너 고생 안 하는 게 우선이야. 겸이 한 명이나 잘 키워'라고 하셨다.


시부모님은 '그래도 둘은 낳아야지 외롭지 않지'라고 하셨다. 남편의 부모에게 차마 '남편이 제대로 돕지 않아서 못 낳겠다'고는 말씀드리지 못했고, 다만 '혼자서 하나 키우기도 어려운데, 둘은 감당 못해요'라고 대답했다. 당시에도 주말부부 생활은 멀지 않은 미래에 예정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약국 정리하면 근처로 가서 키워주겠다'라고 하셨지만, 내 손으로 키울 수 없는 아이를 낳는 일은 결코 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그분들 역시 거주지가 근처라면 몰라도 절대 그곳을 뜨셔서까지 돌봐주시지는 않을 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후에도 종종 역술을 배운 지인이 남편의 사주로 보았을 때 두 자녀일 때 인생이 더 잘 풀릴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며 둘째 이야기를 흘리시긴 했지만, 나도 흘려 들었다. 남편 인생 잘 풀자고 내 인생에 모험을 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다가 결국 주말부부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신다.  



아이 낳는 일은 이렇게 가족의 합의 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온 나라가 출산을 강조하듯 어딜 가나 '애가 하나냐'가 첫 질문이요, '둘째 안 낳냐'가 두 번째 질문이오, '애가 외롭다, 키울 땐 힘들어도 키우고 나면 후회 없다'가 세 번째 해결책이다. 이렇게 자문자답의 3단계는 어딜 가나 변함없다.


특히, 남편과 함께 제주에 머물 때는 하루에 한 번은 꼭 이 말을 들어야 했다. 아무리 외지인들이 많이 드나들고 도시의 화려함을 갖춘 동네라고 해도 사고방식은 여전히 구시대적인 부분이 많다. 막말로 여자들이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도 가부장적인 분위기를 버리지 못한 곳이 제주이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회사 여직원들이 퇴근 후에도 여전히 '집안일은 그녀들의 몫'인 것을 이상할 정도로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 곳이다 보니 이곳에서 둘째는 너무 당연한 가족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알기에 그 질문을 고깝게 듣지는 않았다. '아~ 네~'라고 대답하면 그것으로 대화를 끝맺을 수 있는데, 굳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라며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복직을 하자마자 들었던 도 이것이었다.


"오랜만이야. 고생했어. 이제 둘째도 곧 가져야지."

나이 때문에 힘들다는 나의 변명을 찰떡같이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의 지인은 마흔을 넘어서도 자연임신을 했다느니 하며 나를 설득하려 들기도 했다.


"남편이 곧 제주로 가서 혼자 키우기 어려워요."


두 번째 이유를 대면 교사답게 반박에 능하다.


"애들은 지들이 알아서 커. 큰 애가 둘째 봐줄 텐데 뭐가 걱정이야."


어쩔 수 없이 편부모 아래에서 자라는 거라면 몰라도, 굳이 아빠 없이 또 하나의 아이 키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애들 크면 어차피 부모 안 찾아. 초등학교 4학년만 돼도 부모 나 몰라라 할 건데 뭐."


대꾸해봤자 끝나지 않을 대화이다. 그냥 웃어야 끝이 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왜 대꾸했을까.



심지어는 동생의 병문안을 갔을 때에도 이 말을 들었다. 우리 아이가 노는 것을 유심히 보던 어떤 아주머니께서 '애가 하나예요?'를 시작으로 구구절절 동생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내가 혼자라서 그 외로움이 얼마나 큰 지 알아서 그래요. 외로움만 있는 줄 아나?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의논할 형제자매가 없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인 줄 알아요? 애한테 부담 주지 말어."


"키워주실 건가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분의 의도를 알기에 쓴웃음으로 응대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아이한테 부담 주는 상황 따위는 만들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물론 외로움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싱글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외로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 인간은 타고난 고독이 있고 그 고독을 즐기고 감내하여야 결국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에 우리 아이가 겪을 외로움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또한, 아이가 겪어야 할 부담이 없도록 남편과 내가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할 것이며, 부모와 자식 간의 축복 이외의 모든 의례는 바라지도 않을뿐더러 생략하는 가정 내 문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의 이런 결심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동생을 원하면 어쩌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내가 더 나이가 들어서 임신이 정말 어려운 나이가 되었을 때 동생을 원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한다.


그래서 가끔씩 "겸이는 동생이 있으면 좋겠어?"라고 묻는다. 나의 질문에 아이는 주로 "J(사촌동생)이 있잖아요."라고 대답하거나 "아니오. 괜찮아요"라고 대답을 하곤 했다. 내심 다행스러웠다. 물론 "동생 생기면 겸이에게 많이 신경 써주지 못할지도 몰라"라는 부정적인 언급일절 하지 않았다. 아이의 진짜 마음을 듣고 싶었기에. 다행히 아이는 동생에 대한 간절함은 없었다. 이번 전화에서도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뉘앙스였기에 내 마음에 큰 파란은 없다.


분명한 것은, 타인을 향한 엄마의 사소한 관심에도 질투가 이는 아이에게, 동생은 다른 평범한 아이보다 훨씬 더 큰 스트레스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아빠를 그리워하는 아이는 겸이 하나로 족하다는 생각한다. 게다가 남편 없는 평일에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 직장생활이 가능한 나로서, 둘째는 부모님께도 짐을 하나 더 얹는 일임을 알고 있다. 하기에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


풍성함은 없어도 알차게 키워야겠다.


겸아.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거란다. 엄마는 외로움을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해서 생기는 외로움이라는 것이 있더라고. 겸이 역시 동생이 없어서 심심하고 외로울지도 모르지만, 동생이 있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닐 거야. 때로는 외로움을 즐기고 견디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그럴 때 비로소 진짜 행복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엄마 아빠가 누구보다 좋은 친구가 되어줄게.


사실, 나 역시 주말부부 생활을 하고 나서 오히려 그전보다 덜 외롭다. 비록 몸은 남편과 떨어져 생활하지만, 서로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해져서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며 '남편은 정말 남의 편이었어'라며 구구절절 하소연하던 시절보다 덜 외롭다. 결국 외로움의 근원은 '형체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빈곤함'에 있었던 것이다.


제주에서 혼자 지내는 남편, 남편 없이 지내는 나, 형제 없이 홀로 자라고 있는 아이. 우리 모두는 외롭지만, 그래서 외롭지 않다.


Pixabay





작가의 이전글 주말부부, 사랑의 언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