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제안을 받았습니다.

by teaterrace

퇴근했는데 브런치 알림이 하나 떴다.



출간·기고 목적으로 제안이 들어와 있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이런 알림이 와도 내가 쓴 여행기나 정보성 글에 대한 질문이 주가 되었었기 때문에 대단한 기대는 없었다. 심드렁한 기분으로 메일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기고 제안이었다.


작가님, 이라는 호칭부터 글이 따뜻하여 좋았다, 라는 칭찬까지 무엇하나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요는, 가족여행지에 관한 정보성 콘텐츠를 격월로 연재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가능 여부와 희망 고료까지 알려달라고 덧붙였다. 콘텐츠, 광고주 컨펌, 희망 고료. 낯설고도 먼 단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 일본에 갔던 이야기를 써볼까, 첫 여행지로 어디를 가볼까.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혹시 유명해지면 여행에 투자한 비용을 퍼스널 브랜딩을 위한 자본금이었다 여기면 되는 거 아닐까. 생각은 이미 저 멀리로 가, 디지털 노마드로서 글 쓰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축하와 함께 '우리 색시 멋지다'라고 추켜 세워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주제에 관한 글인지 글의 방향성이 나와 맞는지, 지역적 부담은 없는지 꼼꼼히 체크하라고 일러주었다. 들떠 있는 나와는 달리 조심스러워하는 남편으로 인해 흥분이 한풀 꺾이며, 점차 냉정하게 메일을 읽어낼 수 있었다.


기쁨과 고민이 번갈아 들었다.


브랜드에 기고하는 글이라면 혹시 실수하였을 때 대중의 뭇매를 맞지는 않을까, 브랜드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일이 발생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또한 현실적으로 여러 지역의 여행기를 쓰게 된다면 그 비용 문제는 어떤 가치를 담아 받아들일 것인지도 생각해야 했다. '글을 핑계 삼아 가족여행을 떠나면 되지 않나' 싶으면서도 원고를 쓰기 위해 의무적으로 여행을 가야 한다면 여행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닌가도 고려해 보았다. 무엇보다 전업 작가가 아닌 내가 시간적 제약을 넘어설 수 있을까, 주말마다 만나는 남편과 가족여행이 가능할까, 시간의 가능성도 따져보았다. 결국 제주가 아니면 쉽지 않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응모를 해도 당선되기 힘든 형국에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내발로 찰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솔직한 마음을 담아 글로 썼다.


안녕하세요. teaterrace입니다.

우선 저의 글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그래 왔듯 관광지에 대한 문의 메일이겠거니 생각을 하고 기대 없이 메일을 열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신다는 내용이어서 놀라움 반, 기쁨 반이었습니다. 제가 정식으로 기고를 해 본 경험이 없어 어떤 대답을 드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브랜드를 걸고 하시는 프로젝트라니 과연 제가 해낼 수 있을지 더욱 염려가 됩니다.

그럼에도 제게는 하나의 도전이자 기회이기에 상세 내용을 알고 가능 여부를 판단해도 될지를 우선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전업작가가 아니라 학교에서 재직 중인 교사이다 보니, 귀사에서 원하시는 방향이 어떤 것인지에 따라 저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작업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지역적인 부분입니다. 정보성 콘텐츠의 글이라고 하면 여러 지역의 가족 여행지를 소개하는 것인지, 특정 지역에서 테마별로 소개하는 것인지에 관한 방향성이 궁금합니다. (저는 주로 남편이 머무는 제주에 대한 글만 써 온 터라 지역적으로 편협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가장 큽니다.)

또한, 희망 고료는 일반적인 기준을 잘 알지 못해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횡설수설한 말이지만, 기다리고 계실 것 같아 우선 회신을 드립니다.

이번 제안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teaterrace 드림


어떻게 표현을 해도 '자신 없다, 어렵다'의 내용으로 읽혀서 메일을 보내기가 망설여졌다. 비록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이런 기회가 쌓여 경험이 되고 경험이 많아져야 점점 유명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나를 옥죄었기 때문이다. 일이란 저지르면 어떻게든 수습되는 법이니까 그냥 해본다고 할까.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시간이 제법 흘렀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발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기도했다.


제주 만이어도 괜찮다는 대답이 오기를. 어쩌면 답은 정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제주가 아니면 나는 어렵다는 대답을 해야 했을지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함께 하기 어려울 거 같아 아쉽다는 회신이 왔다. 잠시 망연자실했다.


다양한 지역의 여행정보가 필요한데 그럼에도 가능하겠냐고 물어왔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또 억겁의 고민을 했을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하지만, 단박에 그런 고민이 불필요한 답을 들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이별 선고를 예감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야 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목구멍 깊은 곳에서 매운 감각이 차올라왔다.


받아들이기까지 또다시 시간이 필요했다.


잠을 청했고, 잠시 뒤척이다 생각이 나면 일부러 그 생각을 밀어내 다시 잠을 청했다. 바쁜 일과를 보내고, 냉면을 먹으며 타는 속을 식혔다. 최소한 자책은 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 기분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다.



호텔 커피숍에 들어섰다. 어떤 사람일까.


호텔에서 첫 만남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TV 드라마에서 보면 직원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홀 내부를 돌며 딸랑딸랑 종소리를 울리면 해당하는 사람이 손을 들어 자신임을 알린다. 나도 직원에게 그렇게 알려야 하는 것일까. 촌스럽게 보이면 어쩌지. 찰나에 갖은 고민이 오고 간다.


근처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그런 만남이 익숙지 않은 듯 근처 호텔 커피숍으로 정하자고 했다. 더욱 조심스러운 만남이다. 전화를 걸어 도착을 알리려는데 직원이 다가와서 물었다. 동시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직원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났고, 나는 직원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 홀 내부를 살폈다. 일어나 있는 그를 보았다.


유도를 한 사람이라 그런지 멀찍이서 바라보아도 체구가 꽤나 큰 사람이었다. 마음은 경쾌하게 발걸음은 조신하게 다가갔다.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커피 주문을 했다.


듣던 대로 정중한 사람이었다. 은행에서 근무를 하고, 유도가 취미이며, 장래에 자신의 이름을 건 작은 일식집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요가를 하고 일주일에 한 번 마사지를 받으며, 주말에는 부모님 댁에서 주로 지낸다고 이야기를 했다. 으레 오가는 '평일에 무엇을 하고 지내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는데, "그래서 이렇게 피부가 좋으시군요!"라는 그의 반응에 '타고난 피부예요'라고 농을 던지지 못한 것은 그만큼 신중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가까운 직장 선배로부터 만남을 제의받았는데 그 만남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에 나에게 남자 친구가 생겨버렸다. 만남의 상대는 선배 오빠의 직장동료이었는데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아니다 보니 섣불리 소개 약속을 취소하는 것이 관계상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 즉 나의 남자 친구와 만남의 상대에게는 미안하지만, 약속 장소에 나가서 '잘' 만나고 오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금융업계 종사자답게 말끔하고 정중한 사람인 데다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분명한 세계관과 계획이 있는 멋진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만남을 거절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만남에 임했다. 그리고 잘 보여야 한다는 부담이 없는 자리였기 때문에 본연의 내 모습을 충실히 보여줄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잘 되고 싶은 마음으로 만남에 임할 때보다 최대한 담백하게 '날 것의 나'를 보여줄 때, 상대는 더욱 나에게 호감을 느끼는 듯했다. 이 만남 역시 헤어지는 자리에서 다음 만남을 제안받았고, 차로 역까지 바래다준다는 호의까지 전해받았다. 하지만, 이 만남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정중하게 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배웅에 대한 거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치 빠른 그는 매너 있게 웃으며 "아! 아무래도 다시 뵙기 어려울 것 같네요."라고 멋쩍은 웃음을 내보였다.


우습게도 그 당시 남자 친구는 본래 여자 친구가 있는 사람이었다. 오래지 않아 알게 되어 다행이었지만, 괜찮은 사람을 태운 열차는 이미 떠난 후였다. 그 천하의 나쁜 놈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좋은 만남이 성사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세상사에 우연은 없는 법. 일은 반드시 그렇게 되려고, 세상의 모든 기운이 적합한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오랜 솔로 생활 끝, 찰나의 연애(연애였다고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기간에 부득이한 만남으로 알게 된 그 괜찮은 사람은 나와는 그렇게 인연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그리고 마음에 드는 상대였지만 나의 상황 상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 일처럼, 이번 기고 제안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억지스러운 자위 일지 모르나 아마 일이 이렇게 되려고 우주의 모든 기운이 모여 나의 현재 상황을 만들었나 보다,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게다가 아쉬운 사람을 보냈기에 나는 지금의 남편과 만나게 된 아니던가. 남편과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고, 남편 덕분에 제주에 관한 이야기도 마음껏 쓸 수 있고, 그로 인해 기고 제안까지 받게 된 것일 테고 말이다. 아쉬웠던 만남처럼 내가 떠나보낸 '감사한 기고 제안'도 분명 나에게 더 좋은 기회를 가져다줄 것이라 굳게 믿어본다.





글이 담백하고 따뜻하여 참 좋습니다, 작가님.


위로가 되는 말이다.



메일을 받은 지 꼭 하루 만에 답신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좋은 기회를 뻥 차 버린듯한 기분에 빠져있다가 이제야 마무리 인사를 드립니다.

섣불리 응하지 않고 여쭈어보길 참 잘했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해보는 만큼의 경험치가 느는 것 아닌가' 싶어 잠시 방황을 했습니다. 하하^^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될 것 같다는 남편의 짐작이 맞아떨어지다니 아쉽습니다. 하지만, 적격의 훌륭하신 작가님들이 많으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말씀 주신 것처럼 추후 제주나 특정 지역 콘텐츠를 다루게 되면 다시 연락 주셔요. 그동안 제주 외 다른 곳에도 애정을 쏟아보겠습니다. 제주만으로도 관광객들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곳이 무궁무진하지만요^^

담백하고 따뜻하게 보아주시는 선생님의 시선에 글 쓸 힘을 얻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해주신 제안만으로도 가능성을 확인받은 것 같아 으쓱한 기분입니다.

편안한 밤, 포근한 이불 속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teaterrace 드림.




그리고 믿기지 않겠지만 이 글을 쓴 지 정확히 11시간 만에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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