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 방법
숙소를 예약하고 나니 남편 말처럼 대부분의 고민이 사라졌다.
가장 큰 고민이었던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를 수십 번씩 자문하지 않아도 되며,
이로서 나는 이제 가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필요한 절차만 수행하면 된다.
제주 한 달 살기 카페는 하루에도 수 십 명씩 신규 가입자가 있고,
수십 건의 방 구하기 손님 구하기 글이 올라온다.
처음 며칠간은 소위 눈팅만 했다.
어떤 숙소가 반복적으로 올라오고 있고,
사람들이 어떤 형태와 어떤 지역의 숙소를 선호하는지를 눈대중으로 짐작하는 시간이었다.
나도 그랬지만 처음에는 막연히 정말 제주스러운 숙소를 떠올리게 된다.
제주스러운 돌담과 마당, 그리고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검색에 들어갔다.
검색할수록 '정말 제주스러운 곳'은 내부 인테리어도 정말 시골스러워서 나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시 한가운데서 생활하자니 내 본거지에서의 생활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도 저도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내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워 이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삭제해가며 최종후보순을 결정하기로 했다.
1) 주인세대와 함께 거주하거나, 주인세대가 멀지않은 곳에 거주하고 있을 것
: 운전도 미숙한 데다 혹시라도 아이가 아프거나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 생길 경우 주인세대에 도움을 청할 수 있고, 남편에게도 상대적으로 안심이 되는 공간이라는 장점이 있다.
2) 도시는 아니되, 편의시설(마트, 병원, 도서관 등)이 너무 멀지 않을 것
: 역시 운전 미숙이 가장 큰 이유이고, 아이와 함께 가니 분명 편의시설들은 멀수록 불편하다는 생각이다.
3) 바다가 가까이에 위치할 것
: 이것은 필수 사항은 아니었다. 바닷가 근처에 있어 도보 가능 거리면 가장 좋겠지만, 이런 숙소는 비싸거나 시설이 오래되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차로 5~10분 정도까지는 괜찮다.
4) 가급적 마당이 있는 숙소
: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잘 접하지 못하는 것이 흙마당이어서 넓지 않아도 혹여 비가 와도 잠시라도 뒹굴거나 쪼그려 앉아 놀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5) 아이와 둘이 가기 때문에 너무 호화스럽고 비싼 곳은 피할 것
: 남편이 오가는 길을 도와주긴 할 테지만 메인 생활은 아이와 둘이 할 것이므로, 한 달 숙소비는 100만 원이 넘지 않는 곳으로 계획했다.
(보증금은 돌려받는 것이고, 각종 세금은 쓴 만큼만 지불하면 되는 숙소가 대부분이었다)
6) 가급적 제주 토박이보다는 이주민이 주인인 집
: 제주로 이사 가고 싶어 하는 나에게 현실적인 조언과 함께 이들이 대부분 초등생 부모여서 우리 아이 또래를 양육하는 엄마들의 니즈를 잘 파악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카페에 글을 올렸다.
9/25경부터 아이와 함께 할 한 달 방 구합니다.
1. 기간: 9/25~ 한 달
날짜는 확정한 건 아니고 추석 지나고 한 달 정도 생각합니다.
숙소 사정에 따라 변경할 수 있으나 가급적 9월 내에 출발해야 합니다(이사계획 때문).
2. 숙소 형태: 가급적 방과 거실이 분리된 1.5룸 형태이면 좋겠으나 조건이 좋으면 원룸도 괜찮습니다.
3. 운영형태: 주인세대와 같이 있거나 근처에 계시면 좋겠습니다.
아이와 둘이 머물 기간이 대부분이어서 도움받을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4. 위치: 운전이 미흡한 관계로 병원, 편의시설이 가까우면 좋겠습니다. 걸어가는 거리면 좋겠어요.
(두 돌배기 아이가 놀만한) 애월, 조천 쪽 생각하고 있으나 위 조건이 맞으면 다른 지역도 무관합니다.
5. 가격: 아이랑 둘이라 비싼 곳 원치 않아요.
너무 비싼 숙소는 시간 절약토록 댓글 삼가 부탁드립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시간이 여의치 않네요. 좋은 분들과 인연 닿길 기도합니다^^
주인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세입자로 보여서 인지 아주 많은 댓글과 쪽지가 오지는 않았지만, 불필요한 무작위 쪽지와 댓글보다는 결정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었다. 쪽지와 댓글을 바탕으로 정리해보았을 때 대략적으로 적당한 지역은 애월, 함덕, 조천, 협재 등이었다. 적잖이 제주를 가봤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한 달을 산다고 생각하니 지명을 듣고도 막연했다.
제주지도 하나를 프린트해서 표시했다.
대략 이런 식이다.
제주공항을 우선 표시해놓고 가고 싶은 해수욕장을 밑줄 친다.
거기에 내가 아는 지명에 쉼표로 표시를 해서 우선 큰 아우트라인을 만들고,
후보에 있는 숙소를 찾아 별표를 한다.
(숙소 위치는 숙소의 홈페이지를 이용하거나 주변의 이정표 삼을 큰 건물을 찾아서 표시한다.
포털에서 숙소 주소를 검색해서 지도를 축소/확대해 가며 지도에 별표를 하였다)
그다음은 별표를 화살표로 이끌어내서 숙소 이름/보증금과 임대료/주요특징(주변시설, 숙소형태)/연락처/대여가능시기 등을 간략히 메모했다.
* 아고집
투룸(20/120 절충가능)/구엄초 근처/곽지해수욕장, 하나로마트, 병원 차로 10분 이내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자 내가 원하는 숙소가 대략적으로 어느 위치에 있고, 어떤 특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한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은 전화를 걸거나 카페에서 쪽지를 보내서 그 기간이 가능한지를 묻고
안 되는 곳에 X표, 되는 곳에 OK라고 표시를 해가며 최종후보순을 줄여갔다.
최종후보순은 총 3군데였다.
고민으로 또 며칠이 지났다.
역시 이때도 남편이 구세주다.
“주희는 막상 결정하고 나면 어디든 만족하고 지낼 거야.
사람에 치이지만 않으면...
직접 주인분과 전화를 해보는 건 어때?”
나를 객관적으로 잘 보는 편이다.
사람 때문에 불편한 게 아니면 그냥저냥 잘 지내는 편이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후보 1)
현재 원하는 기간에 이용 가능하다.
아쉽지만 바다, 마트, 병원은 도보거리는 아니란다.
집 앞에 좁지만 프라이빗 공간이 있고, 근처에 초등학교와 교내도서관이 있다.
6월부터 오픈한 곳이라 아직 사업자 마인드라기보다는 숙소구하는 나를 걱정하는 엄마 마인드의 주인분이 마음에 든다. 초등생 엄마이다.
후보 2)
현재 원하는 기간에 이용 가능하다.
쪽지로 보내온 장문의 소개글을 보니 위치도 조천인데다가 전통구옥을 리모델링해서 제주스러운 곳이라고 한다.
제주가 좋아 2년째 살고 있으며 두 딸의 엄마.
주인세대와 한 채, 임대용 한 채. 편의시설도 가깝고, 함덕해수욕장도 차로 5분거리에 있다.
있는 동안 여러 도움을 줄 수 있다하고 교통편도 편하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전화를 해보니 사정이 생겨 중간에 미국으로 가셔야 한다고...
후보3)
어린 아들과 함께 둘이 살고 있다.
마당이 제법 넓고, 마당에 각종 채소를 직접 키우신다. 깔끔한 분이라 관리를 꽤 잘해놓은 것 같다.
바다도 걸어서 갈 수 있고, 집 앞에 의원이 있다.
숙소는 약간 올드해 보이지만 그 외의 것에서 장점이 더 많다.
다만, 주인세대 외 다른 손님이 없어 교류할 기회가 없을 것 같고, 주인분이 토박이 분이여서 아무래도 내 궁금증 해소에는 조금 덜 도움이 될 것 같다. 대답은 즉각적이지만 후보1,2에 비해 딱딱한 반응이다.
후보2는 주인분이 모든 일정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쉽지만 제외하고, 후보1과 후보3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사람’쪽에 무게를 실어 후보1로 정했다.
이런저런 궁금한 것과 요구사항이 많은 내가 상대하기에는 후보1이 편하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후보3의 넓은 마당과 입지조건은 참으로 아쉽다.
아아악~~!! 입금했어.
이제 나는 가야하는 사람이다.
취소하면?
보증금과 임대료의 절반밖에 못 돌려받는다.
가자! 가야지!
숙소에 대해 더 하고 싶은 말!
제주가 낯설거나 보호자와 아이 단둘이 가는 경우, 이런 케이스에 특화된 숙소들이 있으므로 이곳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같은 목적으로 모인 집단이기 때문에 그 나름의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현지에서도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자체 프로그램이 있어 아이와의 제주살이가 막연한 경우 유용할 듯 하다. 하지만, 이런 숙소의 경우, 투숙가능기간이 지정되어있어, 지정한 기간에만 예약이 가능하다. 그나마도 이미 예약이 끝난 경우가 많으므로 미리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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