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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Nov 02. 2017

아깝지 않은 곳에서의 하루

31. <기저귀 차고 제주 한 달> 24일 차




화창한 아침이다. 


어제 인생의 낙조를 보며 힐링도 했겠다 오늘은 멀리라도 달려갈 수 있다. 에코랜드의 상징인 기차 이야기를 꺼내며 아이에게 기차를 타러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평소 아침은 가급적 밥을 먹고 시작했는데 오늘은 먼 길이기에 서둘러 가서 일찍 보고 돌아오려고 간단히 빵으로 먹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준비를 해도 출발시간이 평소보다 그다지 이르지 않다는 점이다. 


항상 지나치면서 보던 목장이 있는데 오늘은 다행히 아이가 잠들지 않아서 차를 세웠다. 알고 보니 유명한 ‘마 방목지’였던 것. 바람도 상쾌하고 볕도 좋아 에코랜드를 조금 늦게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풀을 뜯어 아이에게 주니 오늘도 서슴지 않고 말에게 내민다. 울타리와 난간 사이가 조금 거리가 있어 아이 팔이 닿지 않자, 난간을 올라가 위태롭게 말에게 손을 내미는데 큰 동물도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로 바뀌어 있음에 기특하고 기분이 좋았다. 





조금 더 가서 도착한 에코랜드에는 이미 수많은 차들과 사람들로 북적였다. 부지런한 이들은 이미 구경을 마치고 차로 돌아오고 있었다. 쏠이맘을 통해 괜찮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쨌든 기차를 타는 테마파크 정도로 생각하고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갔다. 


서로 마주 보는 좌석에는 최대 6인까지 탑승할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우리는 유모차를 가지고 타서 아이와 나만 타게 되어 편안했다. 지난번 남편과 간 레일바이크처럼 기차를 타고 자연경관을 관람하는 것인데, 조금 다른 것은 여러 개의 역이 있어서 역마다 내려서 그곳을 구경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차가 출발하니 예상대로 아이는 매우 좋아했다. 제 눈높이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으며 진짜 기차처럼 갑갑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표정이 밝아졌다. 



처음 도착한 역은 ‘에코브리지’였다. 큰 호수의 둘레에 수상데크를 놓아 산책하면서 관람할 수 있게 조성해 놓은 곳인데 물이 무서운 엄마는 조심스러운데 반해 신이 난 아이는 겁도 없이 뛰어갔다. 호수에는 청둥오리도 떠다니고 억새도 있어 제법 근사하다. 간간히 계단이 있어서 유모차 운행에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어려움은 아니었다. 



호수를 한 바퀴 돌고 나니 보트를 타고 있는 또 다른 호수가 나왔다. 신기한 듯 바라보는 아이의 손을 잡고 물었더니 자기도 타고 싶단다. 그래서 티켓을 구매하고 구명조끼를 입고 기다리며 안전 유의사항을 들었다. 핸들을 조작하지 않으면 제 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니 끊임없이 왼쪽 오른쪽으로 돌려야 한다는데 막상 타려니 겁이 났다. 직원의 말로는 수심이 5미터라 물건을 빠뜨리면 찾기 힘들고 혹시라도 사람이 빠지면 전원이 비상끈을 당겨서 보트를 세워야 한다고 하니 더욱 긴장이 되었다. 그래서 탑승하고 사진 한 장만 찍은 후 모든 짐을 직원에게 맡기고 출발했다. 




막상 타보니 조작은 그리 어렵지 않았고, 아이는 내가 하는 것이 재밌어 보였는지 자기가 직접 해보겠다며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아직은 스스로 조작은 어려워서 핸들은 금세 나에게로 넘어왔다. 엔진 소리가 큰 데다 물 위라서 무서워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이 얼굴은 함박웃음이다. 우연히 보트끼리 부딪히기도 했지만, 직원들이 일부러 부딪혀 스릴감을 주기도 했다. 운행시간은 7분에서 10분여. 


범버보트를 내리자마자 아이는 잔디밭으로 달려간다. 너른 잔디밭은 아이들을 본능적으로 뛰게 만드나 보다. 곳곳에 카메라 조형물, 우표 조형물, 흔들 그네 등 각종 촬영 포인트가 있었고 풍차와 멋스러운 나무들을 구경하는데 수학여행단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윽고 다른 역(레이크사이드 역)이 보이는데 그러고 보니 한 정거장을 그냥 걸어온 모양이다. 




역 옆에 억새가 흐드러지게 자라 있다. 빵으로 대충 때운 터라 배도 일찍 고픈 참이다. 다행히 역마다 스낵바나 카페가 있어서 허기를 해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우동을 주문하고 바깥쪽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도 배가 고팠는지 왜 국수 안 주냐며 계속 묻는데 그제야 진동벨이 울렸다. 생각보다 실하게 나온 우동은 맛도 좋았다. 시장이 최고의 찬이라더니 아이도 꽤 많은 양을 먹어서 오히려 내가 국물로 배를 채우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스크림과 츄러스를 사들고 억새밭으로 갔다. 녹차 아이스크림도 녹차향이 진하게 났고, 츄러스도 안쪽에 커스타드 크림이 들어있어 내가 먹어본 츄러스 중에 가장 맛있었다. 자연스럽게 며칠 전 갔던 코코몽에코파크와 비교를 하게 되었다. 



바람도 불고 아까보다 날씨가 제법 썰렁해졌다. 우비 겸용 바람막이 점퍼를 입혔더니 이제는 춥지 않다며 억새 사이를 요리조리 도망쳐 다녔다. 그러다 보니 분위기 있는 억새밭 사진은 없고 촐랑거리는 조랑말 같은 사진만 남았지만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가 즐거워하면 그만이다. 



노란 기차를 타고 ‘피크닉가든’ 역으로 이동했다. 이곳도 드넓은 초록 잔디가 펼쳐진 곳인데 왼쪽 언덕을 오르면 ‘키즈타운’이고, 기찻길 건너로 가면 ‘에코로드’이다. 일단 아이가 있으니 우선 선택은 ‘키즈타운’ 쪽이다. 



‘키즈타운’에는 나무로 만든 각종 자동차와 기차, 그리고 미끄럼틀, 그네 같은 것들이 알록달록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모차에서 자진해서 내려서는 곧장 경찰차로 달려가더니 “엄마! 엄마가 도둑으로 변신해요.”, “나는 이오이오 경찰차다.”라며 나를 겁박해온다. 



신이 난 아이는 경찰서로 뛰어 들어가 얼굴을 쏙 내밀기도 하고, 소방차를 운전하는 시늉도 낸다. 어른도 들어갈만한 높이의 각종 집 속으로 들락거리고, 교실로 꾸며놓은 곳에 들어가서는 “엄마가 선생님으로 변신해요.”란다. 평소에 아빠가 엄마도 선생님이라고 하면 절대적으로 부정하던 아이가 여기에서는 선생님을 하라 한다. 그래도 단연 오래 머문 곳은 역시 경찰차다. 




그렇게 놀다 보니 아이에게서 응가 냄새가 나는 듯했다. 확인했더니 엄마의 코는 역시 개코. 기저귀를 갈고 놀자고 아이의 손을 잡았더니 이내 뿌리치고 도망간다. 기저귀 갈고 놀면 된다고 다시 설명했는데도 막무가내이기에 “엄마도 화났어.”라고 말하고는 벤치에 가서 앉았다. 그랬더니 한참 후에 와서는 “엄마, 화났어요? 엄마, 미안해요.”라고 말하는데 유치하게 나는 또 화가 나 있다. 냄새도 나고 응가는 아무래도 항문이 짓무를 수 있어 웬만하면 확인 즉시 갈아주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아이 입장에서는 눈앞에 너무 재미있는 세상이 펼쳐져 있으니 내 말을 들을 리 없다. 그런데도 나는 아이에게 엄마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물었다. 


“뭐가 미안한데?”

“기저귀 아나(안) 갈고 놀아서 미안해요.”

“엄마는 겸이 엉덩이 아플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건데 엄마 말 안 듣고 겸이 하고 싶은 것만 해서 엄마가 기분이 좋지 않아.”


라고 덧붙여 말했다. 그럼에도 엄마에게 안기려는 아이를 슬쩍 거부했더니 서운한 모양인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아나(안) 그럴게요.”라는 말까지 듣고 나서야 안아주고 기저귀를 갈았다. 


그리고 다시 안아주니 금세 잠드는 거다. 졸려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또 미안해진다. 애한테 이기니까 속이 시원하니? 아무튼 모자란 엄마다. 




막상 아이가 잠이 드니 난감해졌다. 유모차를 가지고 기차를 타기에는 아이가 잠이 들어 힘들다. 고민을 하며 내려오는데 역은 학생들로 긴 줄 행렬이다. 대충 봐도 이, 삼십 분은 기다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떤 엄마가 이런 말을 내뱉는다.


“에잇, 저기 봐. 수학여행 온 애들 천지네. 기다리려면 한참 걸리겠어. 에잇, 똥 밟았네.”


이 말이 두 아이의 엄마가 하는 말이라니 정말 기가 막혔다. 오래 기다리기 싫은 기분은 이해하겠다만, 제 자식들도 커서 중고등학생이 될 텐데, 그들이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듣고 다닌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를 물어보고 싶었다. 물론 그들 면전에서 직접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로서, 게다가 자신의 아이들이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 싶다. 


어쨌든, 나는 일단 카페로 가서 망고주스를 하나 사면서 유모차를 가지고 ‘에코로드’를 걷기에 무리가 되는지 물었는데 의외로 괜찮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래서 쏠이맘도 패스했다는 ‘곶자왈’ 산책을 하게 되었는데 막상 숲길을 걷다 보니 아이가 잠들어주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같이 걸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아이가 잠들지 않았으면 날씨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고 여러모로 패스했을 길이었기 때문이다. 코스는 장거리 코스와 단거리 코스가 있는데, 장거리는 1.9㎞로 40분 정도 걸리고, 단거리는 400m로 1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하는데 아이 잠시간을 생각해서 장거리 코스를 선택했다. 




숲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찬란하게 비치고 있었는데 마치 영화 속 CG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화산송이 흙이 깔려있어 붉은 길은 매우 평평해서 유모차를 가지고 산책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중간중간에 카페와 화산송이 맨발체험장, 포니, 족욕장 등이 있었는데 나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냥 숲길을 걷는 것 자체가 힐링이었다. 


다양한 나무와 꽃들, 그리고 시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게 중에는 ‘제주상사화’ 복원지가 있었는데,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때는 꽃이 피지 않아 ‘꽃과 잎이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상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기구한 운명의 식물도 있었다. 



새소리, 바람 소리가 너무 좋아서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남편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약수터에서 물 한 모금을 맛보고 조금 더 걸었더니 금세 도착지 팻말이 보이는데 여기부터는 계단이 있어 이동이 불편한 사람은 단거리 코스로 돌아가라는 문구를 보고 그쪽으로 돌아 나왔다. 


이제는 역도 한산하기에 줄을 섰는데 다른 곳과는 다르게 이곳 직원은 꽤 고압적이며 불친절했다. 이를테면 “뒤로 물러나 계시라구요, 위험하다구요.”라는 식이다. 막 깨어난 아이를 한 손으로 안고 있는 나에게 “거기에 유모차를 두면 사람들이 내리기 불편하잖아요, 이쪽으로 치우세요.”라며 도와줄 의사는 전혀 없는 말투로 말했다. 아이와 둘이 있으면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고, 그럴 때 닿는 도움의 손길은 참으로 고마운데, 나 같은 사람은 수많은 아이 동반 손님 중에 하나일 뿐이고 ‘나는 원칙대로 일을 할 뿐 너의 불편 따위는 나는 상관없다’ 식의 응대는 서운함을 넘어서서 불쾌함까지 자아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있다. 물론 가끔 임신부인 것이 그리고 아이를 동반했다는 것이 특권인 것 마냥 구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상식적인 사람들은 도움의 손길이 고마울 뿐이지 그 손길이 당연하다거나 도와주지 않는 것을 마땅히 서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나처럼 이곳에 놀러 온 손님이 아니라 직원이기에 최소한 물리적인 도움은 주지 못할 지언 정 그런 말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다음 역은 ‘라벤더,그린티&로즈가든 역’인데 시기 상 예쁜 꽃이 피어있을 것 같지 않아 내릴까 말까를 고민하는데 아이가 왜 꽃 보러 안 가냐는 질문에 서둘러 내렸다. 예상대로 꽃들은 그다지 많이 피어있지 않아 약간 황량한 느낌마저 들었는데 라벤더 가든 쪽은 향기롭고 목장이 내다보이는 뷰도 나쁘지 않았다. 




십 여분 돌고 다시 역으로 왔는데 도착한 기차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못 타고 다음 기차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출발역을 돌아와서 주차장에 오니 시간은 이미 6시가 다 되어가고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일찍 보고 혹시 시간이 되면 쉬림프 박스를 먹고 스위스마을을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어림도 없다. 


깜깜한데 굽이길을 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여왔다. 


그런데 퇴근시간이어서 산길이 그리 빠르지 않았는지 제주시내 쪽으로 안내를 하기에, 갈 때보다 이십 분 정도 더 걸렸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아이는 기차와 배를 탄 것, 말을 본 것 등등 오늘도 어김없이 윗집 이모에게 보고하고, 이모는 이웃집에서 받았다며 커다란 고구마를 몇 개 안겨주셨다. 아침은 빵을 먹고 점심은 우동을 먹어서인지 밥을 먹고 싶다. 얼른 된장찌개를 끓이고 연어와 옥수수를 넣고 계란을 볶아서 후딱 해치웠다. 



기대보다 알찬 하루를 보낸 것 같아 뿌듯한 하루다. 아이도 나도 금세 잠들었다.       





Epilogue

아이가 새벽에 여러 번 울면서 깼다. 아기 때는 배가 고파서 깼지만, 조금 커서는 꿈을 꾸다가 잠꼬대를 하는데 몇 마디 하고 잠들 때도 있고, 오늘처럼 울면서 깰 때도 있다. 하지만, 오늘 잠꼬대는 조금 마음이 아프다.

아이는 울면서 “엄마, 화났어요?”, “엄마, 미안해요.”란다. 아마 낮에 똥기저귀 안 간다고 아이를 울린 것이 꽤나 속상했던 모양이다. 생활하면서 놀다 넘어지거나 부딪혀도 어지간히 아파지 않고서는 울지 않고, 나 역시 아이를 울리는 일이 거의 없는데 그래서인지 오늘처럼 속이 상해 운 날은 꿈도 꾸나보다. 나도 낮에 있던 일을 꿈으로 꾸는 일이 많은데, 남편은 엄마를 닮았나 보다며 가볍게 여기지만, 웃음을 주는 것도 엄마요, 울게 만드는 것도 엄마인지라 이런 아이의 잠꼬대가 엄마는 마음이 아린다. 

미안해, 우리 아가.

{오늘의 가계부}
에코랜드 입장권 0원(코코몽 에코파크 세트권 구매, 24개월 이상 유료)
범버보트 2인용 9천 원
점심 1.2만 원 (우동 6천 원 +츄러스 3천 원 +아이스크림 3천 원)
망고주스 3천 원



Today's meal

-조식: 빵 +우유

-중식: 우동 +츄러스 +녹차 아이스크림  

-석식: 된장국 +연어 옥수수 계란 볶음 +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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