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 MYP 수업에서 학생과의 대화

by Tech

나는 대구에 있는 IB 월드스쿨에서 근무하고 있다. 2023년에 현 학교에 와서 3년째 근무하고 있다. 중학교 IB 프로그램인 MYP(Middle Years Programme)는 8개 교과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내가 담당하는 교과군은 디자인(Design)이며, 나는 기술과 교사다.

IB 수업은 단원(unit) 중심으로 운영되는데, 이번에 내가 설계한 단원명은 ‘AI의 양면성 탐구를 통한 나만의 AI 활용법 영상 제작하기’이다.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은 이 단원에서 생성형 AI의 양면성을 탐구하고, 자신만의 AI 활용법을 주제로 영상을 제작해야 한다. 하지만 영상만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IB의 평가 기준에 따라

A. AI가 무엇인지 조사하고,

B. 영상 제작을 위한 스토리보드를 설계하고,

C. 설계도에 따라 영상을 제작하며,

D. 완성한 영상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하나의 영상을 완성하기까지 체계적인 절차를 거치는 것이 이 단원의 핵심 목표이자 평가 요소다. 평가 요소는 총 16가지이며, 학생들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부담일 것이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이번 단원을 체계적으로 설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IB 프로그램 정석에 따라 활동을 구성하고, 총괄평가 과제도 촘촘히 짜보기로 했다. 약 20일 동안 단원 설계에 집중했고, 마침내 더없이 완벽한 단원을 완성했다고 뿌듯해했다. 단원 흐름은 매끄러웠고, 각 단계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는 수업만 잘 운영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2학기가 시작되자 바로 단원 수업에 들어갔다. 중학교 3학년 2학기는 모든 수행평가가 10월 말 이전에 끝나야 해서 시간 여유가 없었다. 주 2시간 수업으로 계획한 내용을 풀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수업을 더욱 빽빽하게 운영했다. 단원 초반에 학생들이 보였던 흥미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계속되는 프롬프트 연습과 생각 끄집어내기 활동에 점점 지쳐갔다. 1학기처럼 무언가를 만드는 활동을 기대했던 학생들은 수업 내내 크롬북으로 타자만 치는 자신들의 모습에 당황스러워했다.

“2학기에는 쓰는 걸 줄여주신다더니, 배신당했어요.”

학생들의 불평불만이 커졌다. 이 무렵, 평소 성실하고 모범적인 남학생이 매일 쓰는 성장 노트에 이런 글을 남겼다. (학생이 자신의 실명을 꼭 밝혀달라고 해서 그대로 옮긴다.)



10월 15일 수요일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


(원래 일반적인 성장일지처럼 반말로 적었으나, 질문을 올린다는 상황에는 맞지 않고 너무 예의 없어 보여서 이번 성장일지만 특별히 존댓말로 바꿨습니다. 따로 수정된 내용은 크게 없으니 안심하고 피드백 주시면 됩니다.)


안녕하십니까. 친애하는 기술 선생님. 저는 수행평가를 하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때는 이번 주 수요일, 기술 수행평가 영상을 만들기 위해 일단 임시 촬영을 집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물로 나온 몇 분짜리 영상을 보니, 허무함만이 남았습니다. 결과물은 흡족했습니다. 지금 당장 간단한 편집만 거쳐도 100점은 거뜬히 맞을 만한 영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작 2분짜리 영상을 만들겠노라고 문서 작업을 5시간(기술 수업 차시로 치면 훨씬 많음)이나 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A 평가에서 조사한 내용들은 어차피 영상 시간이 모자라서 언급조차 못 했습니다. 또한 2분의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 B 평가에서 굳이 '6단계'로 나누어 설계를 한 점, C 단계에서 제작 계획까지 세운 점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기술이란, 효율의 과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 두 가지를 제시하겠습니다.


1. F-14를 이후로 가변익기가 거의 사라졌다.

2. 초음속 여객기 사업이 전 세계에서 사장된 이후 함께 사라진 경사익기.


앞의 두 가지 예시는 모두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경쟁에서 밀려나 사장되었습니다.


가변익기는 음속 이상의 고속에서는 날개가 뒤로 접어져서 항력을 줄였고, 저속에서는 날개를 펼쳐 양력을 늘렸으나, 날개를 접기 위한 두 개의 피벗이 너무 복잡하고(날개를 잘 고정해야 하기 때문) 자주 고장 났으며, 유지비가 많이 들어서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경사익기는 하나의 피벗만 쓰고도 가변익기만큼의 능력을 뽐냈지만, 마찬가지로 초음속 여객기가 쓸모없어지면서 사라졌습니다.


그 어떤 과목보다 효율과 효과를 따져야 하는 과목이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1분 내지 2분의 영상을 만들기 위해 AI의 빛과 그림자를 우선순위까지 나눠가며 조사하고(A평가), 6단계로 나눠서 대사 및 내레이션과 효과음까지 일일이 설계하고 영상 콘셉트까지 잡고(B평가), 또 그것을 한번 더 쪼개서 어떻게 대본을 짜고 영상을 찍을 것인지 계획하는(C평가) 과정은 너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을 사랑하고 탐구하는 한 명의 덕후로써, 이것은 기술에서 추구하는 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선생님께 질문을 올리는 바이고, 절대 선생님의 평가 가치관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니, 부디 궁금증 많은 제자의 어리광으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짧은 글이라거나, 교육부 지침이라 어쩔 수 없다는 둥 염세적인 답변도 저는 상관없으니 피드백을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총총 컴퓨터를 끄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3학년 3반 김범수.



평소에도 긴 글을 쓰는 학생이었지만, 이번 글은 유난히 길었다. 그리고 정말 훌륭했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이런 글을 술술 써 내려간다는 건 배경지식은 물론, 비판적 사고력과 꾸준한 글쓰기 습관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매시간 학생들의 성장 노트에 답글을 달고, 응원의 피드백을 보내왔는데, 이번 글은 평소처럼 짧게 답할 수 없었다. 학생이 보여준 성의에 정성으로 보답하고 싶었다. 얼마나 기특한 학생인가. 그래서 다음과 같이 피드백을 남겼다.



범수의 질문에 선생님이 말투를 편하게 해서 답해볼게.


1. 먼저, 이런 질문을 한 건 정말 용기 있고, 비판적 사고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이전 글과 형식을 달리해서 공손하게 표현하며, 혹시 버릇없게 보일까 조심하면서도 자기 생각을 당당히 쓴 범수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2. 선생님은 범수의 문제 제기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범수를 포함한 3학년 전체 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구나. 2학기는 성적을 일찍 마감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선생님이 조금 무리했어. 욕심이 컸던 것 같아. 여름방학 동안 이번 수업을 설계하면서, ‘무엇을 함께 해야 너희에게 의미가 있을까?’를 정말 많이 고민했단다. 그때 이미 AI가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너희가 미리 다뤄보면 앞으로의 공부와 삶에 큰 도움이 될 거라 믿었어. 하지만 생각보다 너희들의 관심과 반응이 적었고, 일상에서 AI를 쓸 기회도 많지 않아서 고민이 커졌단다. 시기상조였구나. 돌아보면 다른 유닛으로 설계할 걸 하는 후회도 들어. 후후.


3. 범수도 알다시피, 기술 교과의 디자인 사이클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합리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단다. 어떤 문제 상황이 주어지면 A. 조사하기 → B. 계획하기 → C. 실행하기 → D. 평가하기의 네 단계를 거치며 문제를 해결하지. 문제의 성격에 따라 강조점은 달라지지만, 이 네 단계는 문제 해결의 기본 흐름이지. 학교 교육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물론 선생님이 가끔 “결과의 질이 중요하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교육의 무게 중심이 과정에 있다는 건 범수도 잘 알 거야.) 과정을 차근차근 밟는 것을 목표로 한단다. 결과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공정성이 무너지고, 우리 사회가 가치 있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흔들리게 되지.

4. 이번 유닛의 목표가 ‘2분 내외의 영상 제작’이었지만, 영상 제작과 함께 중요한 것이 AI가 무엇인지 조사하고, 직접 사용해 보고, 계획을 세워 제작하고, 완성된 영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었지. 이 일련의 모든 것이 전부 ‘과정’이라는 교육 속에 포함된 것이지.


5. 유튜브 콘텐츠를 만드는 범수나 도현이 입장에서 보면, 조사나 스토리보드 작성, 제작 계획 세우기 같은 단계가 형식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거야. ‘이런 절차 없이도 조회수 높은 영상을 만들 수 있는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스토리보드를 짜고, 제작 계획을 세워야 하지?’하고 생각할 수 있을 거야. 선생님도 충분히 공감해. 그런데 이런 체계적인 과정이 있기에 콘텐츠의 신뢰성과 완성도가 높아지는 경우가 많단다. 전문 유튜버나 방송 PD들도 모두 이런 절차를 거치지. 다만 선생님이 미안하게 생각하는 건, 주 2차시 수업만으로 이 모든 걸 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야. 그게 이번 유닛에서 선생님이 놓친 부분이지.


6. 범수가 ‘기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주 통찰력 있게 이야기했구나. 맞아, 효율은 기술의 핵심이자 목표이지. 적은 자원으로 더 큰 효과를 내는 것은 경제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기술이 추구하는 방향이기도 하지. 이 관점에서 보면 좋은 기술이란 최소의 투입으로 최상의 결과를 내는 것이야. 선생님도 범수의 생각에 200% 공감한단다.

하지만 모든 기술이 처음부터 효율성을 추구하는 건 아니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명할 때는 조사·계획·실행·평가의 과정이 단선적이지 않고, 수없이 반복되며 시행착오를 겪지.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세상에 없던 발명품이 등장한단다. 그런데 그건 아직 ‘발명가의 작품’이고,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 제품’이 되려면, 다시 조사부터 평가까지의 비효율적인 과정을 수차례 거치지. 테스트하고, 개선하고, 또다시 수정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거야. 이 과정을 버텨 살아남은 제품만이 비로소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대량생산의 길에 오른단다. 즉, 우리가 보는 기술의 결과물은 ‘효율’을 상징하지만,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끝없는 ‘비효율’의 반복이 숨어있지. 이게 바로 기술의 역설이고.


7. 학교 교육도 이와 비슷해서, 효율을 좇기보다 때로는 비효율을 견디는 과정이 너희를 더 크게 성장시켜 준단다. 틀린 수학 문제를 공부할 때 효율적인 방법은 답지를 보는 거겠지. 하지만 스스로 끙끙대며 풀어보는 그 시간이, 당장은 성과가 없어 보여도 생각하는 힘을 길러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지금 너희는 인생의 승부를 걸 때가 아니고, 사회 중심에 서게 될 때를 위해 준비하는 시기지. 그때까지는 다소 비효율적인 공부, 조금 돌아가는 삶을 살아도 괜찮단다.


8. 범수의 문제 제기와 근거 제시,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풀어내는 글쓰기 능력은 정말 뛰어나구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힘은 어떤 분야에서든 요구되는 전문성의 핵심이지. 말보다 펜이 훨씬 강력하다는 걸 기억하며, 앞으로도 지금처럼 글로 생각을 정리하는 연습을 계속하거라.


9. 선생님이 조금은 방어적인 태도로 범수의 문제 제기에 답한 것 같구나. 사실 손으로 만들며 배우는 즐거움을 중시하는 선생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 유닛은 너희를 조금 불행하게 만든 부분이 있었단다. 그래서 수업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하구나. 범수가 3학년 대표로서 친구들의 마음을 담아 이런 문제를 제기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일 덕분에 선생님도 수업 설계와 운영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단다. 고맙다. 범수야.^^



글을 쓰고 나니, 전체 선생님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학생에게 허락을 구하니 흔쾌히 좋다고 했다. 그래서 김범수 학생의 글과 나의 피드백을 문서로 정리해 메신저로 보냈다. 몇몇 선생님들이 피드백을 남겨주셨고, 그게 참 뿌듯했다.

이 일 이후로 김범수 학생에 대한 신뢰는 더 깊어졌다. 서로 그 이야기를 직접 나누진 않지만, 가까이 있으면 자연스레 느껴진다. 그래서 이 반 수업은 들어갈 때마다 마음이 한결 가볍고, 기분이 좋다.


아래는 일부 선생님들께 메신저로 받은 피드백을 캡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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