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는 '인생작'이라고 꼽는 드라마나 영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각자 추구하는 가치관이 다르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다르기에 인생작 역시 인구수만큼이나 많지 않을까.
'라떼워킹맘'은 영화나 드라마 보는 것을 정말 좋아해서 인생작을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으로는 좀 어려워. 굳이, 반드시 다섯개를 꼽아야 한다고 협박(?)을 한다면 꼭 들어가는 드라마가 있지. 바로 '미생'이야.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드라마 '미생'이 인생작이라기 보다는 웹툰 '미생'이 인생작이지. 집에 만화책 전권을 보유하고 있고 최소한 20번 넘게 봤을꺼야. 그만큼 나에게 '미생'은 최고의 작품이었어.
그러니 미생 시즌2가 나오기를 얼마나 기다렸겠어. 미생 시즌2가 나온다는 소식에 가슴이 두근두근하더라고. 시즌2를 보기에 앞서 시즌1을 경건한 마음으로 복습해야하지 않겠어? '라떼워킹맘'이 꼽은 시즌1 명장면을 한번 같이 보자고.
내가 2년차 기자였을 때야. 5년차 기자 선배가 나에게 조언을 해준 적이 있어. 기자로서 고민이 있었고 그 부분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들려 준 적이 있지.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조언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선배의 말이 맞기도 하고, 사실이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와닿지 않았어. 당시 나의 고민은, 결국 기자 생활 7년차가 돼서야 해소됐어.
당시에는 왜 그 선배의 조언이 마음에 들어 오지 않았을까.
미생이라는 만화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어.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바둑이 있다는 것을...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것을 더 가치있다고 여기는데, 그 선배가 해준 충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내가 가슴으로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더라고.
착하기만 한 '박대리'가 평소답지 않게 용기를 냈다가 불안해 하는 것을 본 장그래는 어줍지 않게 충고를 하지. 그런데 '박대리'가 결국 자기답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고 무언가를 깨닫게 돼. 다들 자기만의 '바둑'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
이 장면 덕분에 나는 상식이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서 지울 수 있었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결국 '내 입장에서, 내 가치관에서 생각했을 때'더라고.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내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하는 조언은 옳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고, 그 바둑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해주는 것이 최고의 조언이라는 사실도 함께 말이야.
두번째로 꼽은 명장면은, 사실은 너무나 철저하게 개인적인 시선이야. 내가 '라떼워킹맘'이기 때문에 이 장면을 보면서 오열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 돌도 안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을 해야 하는 워킹맘의 비애가 너무나 잘 드러나는 장면이었거든.
직장에서는 꽤 인정 받는 '선차장'이지만 자신의 아이가 그린 가족 그림에 엄마의 얼굴이 없는 것을 보고 엄청난 갈등을 하게 되지. 일도, 엄마 역할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선차장'은 이후에도 숱한 마음 고생을 겪곤 해. 나 역시 수많은 병치레를 하고 있는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느리다는 진단에 무너졌던 순간들,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실연당한 여자처럼 울던 내 모습들이 떠올랐지.
이 장면에서 '생활 때문에 널 미루지 않을게'라는 '선차장'의 대사가 가슴에 깊이 박혔어. 그리고 나는 진짜 단축근무를 신청하면서 아이의 지금 시간을 미루지 않았어.
오상식 차장이 계약직이지만 최선을 다해 일하는 장그래에게, 크리스마스 카드에 적어준 문구였어. 고백해보자면 너무 부끄럽지만 나는 이 문구를 보자마자 폭풍 눈물을 흘렸어.
다들 칭찬 받으면 기분 좋고, 삶을 살아가는 활력소가 되기도 하고, 칭찬을 통해 자존감이 세워지기도 하지. 하지만 현실은 칭찬보다는 비판 받고 혼나는 일이 더 많지. 내가 과연 언제 따스한 칭찬을 받아본 적이 있나 싶더라고. 직장에서는 선배들의 비판, 집에서는 워킹맘이라는 죄책감에 스스로에게 내리는 비판.
그런데, 누구하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없잖아. 물론 인생을 대충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해. 그들에게 누군가는 '더 할 나위 없었다'는 인생 최고의 칭찬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비록 웹툰이었지만, 나는 왠지 이 말을 나한테 해주는 것 같더라고. 그동안 힘들게 살아온 나에게 '더 할 나위 없었다'고 오 차장이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았어. 그렇게 나는 힘들었던 34년 인생에서 최고의 위로를 받았지.
바둑은 장그래의 인생이야. 바둑으로 성공을 하지는 못했지만, 바둑으로 인생을 배웠던 장그래는 모든 삶을 바둑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로 인해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사안을 바라보곤 하지. 그 덕분에 장그래는 회사 상활을 꽤 잘해.
이 장면은 직장생활은 '일희일비'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주지. 사실 '바둑' 한판 진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이 크게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잖아. 그래봤자 바둑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바둑'이기에 충분히 좌절할 수 있고, 당장은 우리의 인생이 흔들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해. 그래봤자 '바둑'이라는 것은 당사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극복하면 되고, 주변에서는 그래도 '바둑'이라고 생각하고 '바둑'에서 진 그를 위로하고 감싸 안아야 되지 않을까.
이 장면을 통해 스스로는 좌절하지 않는 법을, 그리고 남들을 위로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 누구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그래도 '바둑'이라는 생각으로 남의 삶을 존중한다면 회사 내에서의 갈등은 사라지지 않을까.
누군가는 겨우 웹툰을 보고 인생을 결정하냐고, 위로를 받냐고, 교훈을 얻냐고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위로를 받고 결단을 내리는 계기가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콘텐츠의 힘은 그런 거니까.
미생 시즌2에서의 장그래는 여전히 더 할 나위 없을까...그는 여전히 자기만의 바둑을 두고, 그래봤자 바둑이고, 그래도 바둑이라고 생각할까. 미생 시즌2가 다시 한번 나의 인생작이 될 수 있을까?
이소라 기자 sora@tech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