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30분. 잠을 잔 건지 만 건지, 불쾌한 피곤함에 젖어 나는 몸을 일으켰다. 밤새 정신없는 꿈을 꾸었던 것 같았다. 오늘은 3월 2일, 적어도 학교라는 곳에 발을 들여 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가 아는 그 날. 바로,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학교에 도착하자 2월의 전 교사 출근일과는 사뭇 다른 활기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등교시간 훨씬 전에 도착했는데도, 애들이 많이 와 있었다. 역시, 학교엔 애들이 있어야 해. 이제야 학교 같네. 나는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애쓰며 교무실을 향해 걸었다. 교무실로 향하는 길에는 3학넌 교실들이 줄지어 있었다. 의외로, 험악하게 생긴 아이들도 나에게 인사를 했다. 복도에서도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는 일진들만 생각하고 왔는데, 예상과 다른 모습에 당황스움을 느끼며 나는 인사를 받았다.
담임의 교실 입실 시간은 8시 55분이었다. 나는 45분에 교실로 올라갔다. 55분에 맞춰 올라갈까 고민하다가, 일찍 온 아이들이 칠판에 붙은 자리표대로 잘 앉았는지 확인하고, 아이들과 인사도 미리 나누고 싶어 용기를 냈다. 올라가는 길에도 많은 아이들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예전 학교와 다른 이 활기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거기는 적어도 3월 한 달 정도는 아이들이 자리에 앉아 공부만 하는 분위기였는데(특히 3월에 3학년 교실을 지나갈 때면 무서울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여기는 공부를 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건지 모두들 복도로 나와 길었던 방학에 관한 이야기꽃이 한창이었다. 사방에서 미친 듯이 들려오는 X발, 존X, X같네, X같은 X끼, 이런 단어들을 이야기의 '꽃'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마침내 나는 4반 교실 앞에 도착해서 문고리를 손에 꽉 쥐었고,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갑자기 문득, 14년 전 가을 첫 교생 실습을 나갔던 때, 첫 수업을 들어가던 순간 교실 앞문을 잡고 덜덜 떨었던 기억이 스쳐갔다. 그 날 그 교실의 차갑던 문고리가 지금과 꼭 닮았었다... 그래, 이제 이판사판이야. 특성화고면 어쩔건데, 양아치면 어쩔건데. 난 이제 그 때의 그 교생이 아냐. 겁먹지 말자.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안녕 얘들아, 하며 힘차게 앞문을 열었다. 조용히 앉아 있던 남자 아이들 몇이 웅얼거리며 나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우리 반 교실은 아직 고요했다. 나는 아이들이 자리표대로 앉았는지 확인하고 누가 아직 안 왔는지 체크를 한 후,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매치시켜 외워보려 부질없이 애썼다. 나는 우리 반이 상당히 조용한 반인것 같아 그래도 올 한 해가 걱정만큼 힘들지는 않겠다는 희망에 차 있었다. 그러나, 8시 55분쯤에 들어온 두 남학생 덕분에 그 말도 안되는 희망은 무참히 깨졌다. 누가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두 명의 덩치 큰 남학생이 큰 괴성을 지르며 뒷문을 발로 차고 들어왔다. 그럼 그렇지, 너희 같은 애들이 없을 리가 있나. 나는 생각했다.
"쌤이 저희 담임쌤이에요?"
"응, 너네 이름이 강남주랑 김현욱 맞아?"
"네."
"남주는 여기, 현욱이는 저기 앉으면 돼."
"왜요?"
"학기 첫날이니까 나랑 다른 교과 선생님들이 너희 이름 외우시기 편하게 번호대로 앉는 거야."
"전 맨 앞자리에 앉기 싫은데요?"
이 학교 첫 날 학생과의 첫 대화가 이런 식이라니. 이게 주작(?)이 아니라 진짜 열 여덟 살 고등학생이 교사와 나누는 대화라니. 초등학생도 학기 첫 날은 이렇게는 안 하겠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예상했던 바야. 이렇게 예상대로 딱딱 맞아 떨어져 정말 유감이지만. 반말 안하고 존댓말 써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찰진 욕을 던지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나는 10년 만에 깊은 곳에서부터 불쑥 올라오는 트라우마를 누르고 일정한 목소리톤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럼 네가 강씨라서 1번인걸 어떡하겠어? 서로간에 익숙해지면 바꿔 줄테니까 지금은 그냥 앉아."
"아 진짜 싫은데..."
어쩌고 저쩌고, 남주가 궁시렁대며 자리로 가는 사이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오늘 1교시는 개학식 겸 담임시간이고, 2교시는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영상을 통한 교육이 있었다. 그것을 알리는 방송이었다.
(사실, 인문계 고교에서는 이런 식의 영상을 통한 창체 교육은 거의 없어지는 추세이다. 대입에서 창체활동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따라서 내실있는 창체활동을 해야 생활기록부에 훌륭하게 써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상 교육으로 창체를 운영하면, 아이들이 공부하느라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 그런데, 우리 학교 아이들은 일단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책상 위에 책도 없고 펜도 없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 학교는 특성화고인데도 아침조회 때 핸드폰을 걷고 종례 시간에 다시 나누어 주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런 창체 교육 시간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니 결국 영상을 보고 있게 되고, 의외로 창체 교육의 효과가 있게 된다. 심심함이 만드는 집중력이랄까.)
1교시가 시작되고, 나는 교탁에 서서 새롭게 내가 맡게 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많은 관심이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생각보다 아이들은 더 무기력했다. 영혼은 아직 집에 둔 채 몸만 간신히 학교에 온 아이들. 나는 나대로, 아이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어떤 말을 하기가 조심스러웠다. 특성화고 아이들이 어떤지 전혀 모르다보니, 나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말, 또는 단어 하나가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예를 들면, 내가 특성화고에 왜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할 때, 솔직하게 '내가 여기 오겠다고 고른건 아니었어'라고 말하는 것도 아이들의 기분이 나쁠 것 같았고, 반대로 '특성화고 아이들은 어떨지 궁금해서 내가 여기 오길 자원했어'라고 거짓말을 한다 해도 뭔가 아이들의 기분이 나쁠 것 같았다. 나는 아이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조심하며, 간단한 내 소개와 함께 나의 학급에서 꼭 지켜야 하는 학급 규칙 등에 대해 설명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15분 남짓 이야기를 하는 동안, 벌써 '모범생인' 아이와 '모범생이 아닌' 아이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내 이야기가 끝난 후(많은 아이들이 졸고 있었기에 나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간략하게 마무리되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스스로를 소개하는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게 했다. 서로 펜을 빌리고 빌려주며 잠시 교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내 말이라면 아무것도 안 들을 것 같던 남주와 현욱이도 잠에서 깨어나 나에게 펜을 빌려갔다. (아이들이 펜 한 자루 조차 안 들고 다닌다는 어떤 선생님의 충고에, 여분 펜을 열 자루 쯤 가져 갔었다.) 이 때 어떤 아이가 중얼거렸다.
"와, 나 올해 볼펜 처음 잡아봐. 손가락이 안 구부러져."
그제야 나는 교실이 2월에도 생각보다 더럽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건,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해서 샤프심이나 지우개 가루가 굴러다닐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샤프심이 책상이나 의자의 다리 아래로 들어가 버리면, 책상이나 의자를 밀 때 긴 자국을 만들어 내는데, 이게 보기도 싫고 지우기도 어렵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애초에 샤프를 쓸 일이 없으니, 교실 바닥에 널부러지는 건 머리카락이나 큰 쓰레기들 뿐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쓰레기만 정리해 놓으면 쾌적한 교실을 1년 내내 유지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 어차피 청소도 제대로 안 할 아이들인데, 이게 오히려 다행이겠지.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 때, 또 어떤 학생이 불쑥 말했다. 남주, 현욱이랑 크게 다를 것도 없어 보이는 불량한 말투를 지닌 준혁이라는 아이였다.
"쌤, 근데 이거 답을 다 달아야 해요? 왜 이렇게 양이 많아요? 저 글씨 쓰기 싫어요."
나는 이제 정말로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응, 하나도 뺴지 말고 다 달아. '모른다', '생각 안해봤다' 이런 말 쓰지 마. 난 너네들에 대해 알고 싶은게 많아. 난 너희가 너무 궁금하거든."
사실, 자기소개서에 들어간 질문이 평소보다 조금 많기는 했다. 나는 정말로 이 아이들이 궁금했다. 무엇보다 제일 궁금했던 건, 왜 이 학교에 오게 된 걸까, 였다. 인문계 고교를 나와 대학에 가는 것이 이젠 '당연하고 평범한' 일이 된 세상에서, 왜 이 아이들은 과감히 그 틀을 깨려고 시도했을까. 왜 이런 '용기 있는' 선택을 했을까.
준혁이가 조용해진 후에는, 서걱거리는 볼펜 소리만이 교실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