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담임 시간이 끝나고 나는 교무실에 돌아와서 아이들이 적은 자기소개서 내용을 천천히 읽어 보았다. 한 명 한 명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어갈수록 나는 더욱 더 고민에 빠졌다. 왜 **공고에 왔는지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아이들의 대부분은 '공부를 너무 못해서', '공부하기 싫어서'라는 답을 적어냈다. 무언가 특성화고에서 이루고 싶었던 꿈이 있어서 지원한 친구가 조금이라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런 아이는 열 네 명 중 단 한 명이었다. **공고에서 하필이면 왜 컴퓨터과를 선택했는지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이유보다는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다'는 내용을 적은 아이들이 많았다. 기계과나 전기과는 어려운 실습을 많이 할 것 같아 가고 싶지 않았고, 그나마 자기들이 평소에 끼고 사는 컴퓨터를 골랐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에게 충격이었던 건, 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적어달라, 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모르겠다', '답이 없다', '아무데나 불러주는 곳에 갈 것이다', '집을 나갈 것이다', '배달 아르바이트'라는 답들 모두 암담했지만, 내가 읽자마자 한참을 멈춰 있었던 단어는 바로 준혁이가 적어낸 두 글자,
'자살'
이었다.
가족관계, 교우관계, 학교에서 행복했던 일, 슬펐던 일, 가장 재미있게 배운 과목, ..... 아이들의 많은 답들이 줄줄이 지나갔지만, 그 어떤 것도 저 두 글자를 밀어내지 못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저걸 하겠다고. 나는 저 단어를 키보드로 두들기는 것 조차 소름이 돋아 단 한 번 쓰는 것에도 이를 악물었는데, 누군가는 교사에게 처음으로 제출하는 서류에도 저런 단어를 거리낌없이 쓴다. 준혁이에게 나와의 하루, 나와의 상담, 내 과목을 수업하는 것이 의미가 있긴 할까? 이 아이는 어떤 생각으로 매일을 살고 있는 걸까? 나는 오늘 하루종일 보았던 준혁이의 모습을 생각했다.
별다른 것도 없었던 것 같았다. 많이, 아주 많-이 반항적이었다는 걸 빼면.
*
아이들과의 만남은 설렘보다는 걱정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3월 2일 나에게는 2시간의 수업 - 3반, 9반 - 이 있었다. 4반 아이들과의 첫 만남이 끝나자마자 나는 9반 수업을 들어가기 위해 마음을 다시 잡았다. 어떤 아이들이 있을까. 우리 반의 남주 같은 아이가 한 트럭 있는 반도 있겠지.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수업을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앞이 캄캄했다. 작년까지는 생기부에 들어갈 내용을 위한 기초 자료를 써서 내게 했었다. 그래서, 비슷한 자료를 일단 만들어 놓긴 했는데, 아이들이 과연 얼마나 성실하게 기초 자료를 작성해 줄 것인가. 얼마나 아이들을 수업에 참여시킬 수 있을까. 수업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물들(노트북, 나이스 출석부, 볼펜, 분필, 인쇄한 자료 등등)을 갈무리하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 하루 쉬는 한숨이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가 없었다.
역시 '안녕, 얘들아-'하며 힘차게 9반 앞문을 열고 들어갔다. 분위기는 냉랭하고, 심드렁했다. 지금껏 나름대로 많은 교탁 앞에 서 보았지만 이런 차가움은 처음 느꼈다. 담임 반에서 느꼈던 차가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담임은 학생들의 학교 생활 전반에 관여하니 아이들도 그나마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 생각에 그 냉랭함은 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개학에 대한 반발심인 듯 했다. .....이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렇게라도 나 스스로를 당장 위로하지 않으면 그 교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질 것 같았다. 추운 겨울인데도 뒷목에서 땀이 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한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내 이야기, 혹시 A시에서 등하교하는 친구가 있는지, (놀랍게도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이가 있었다!), 내 과목에 대한 이야기 등등 준비해 간 이야기를 혼자 신나게 풀었다. 반 아이들의 절반 정도는 간혹 반응을 보여주었다. 웃어주기도 했다. 마른 가뭄에 단비같은 그 미소가 고마웠다. 아이들에게 내가 준비해 간 기초 자료를 작성하게 해 놓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 힘들겠지. 게다가, 너희 인생에 하등 쓸모 없는 과목일테고. 제일 처음에 밝혔듯이, 나는 수능에 출제되는 주요 과목 중 하나를 가르치고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수능을 볼 일이 거의 없는 이 아이들에게 내 과목이란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일 터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 부장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어주었다.
"첫 수업 어땠어요? 아이들은 어때요?"
"음......"
정리되지 않은 여러 가지 생각들이 쉼없이 떠올랐다. 바로 두 달 전까지 내가 했던 수업들과 오늘 한 시간 수업의 괴리감이 너무 컸다. 앞으로 이런 수업을 하며 1년 - 아니 일반 전보를 쓸 자격이 주어지려면 최소 2년이다 - 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2월 내내 마음을 다잡았는데도 나는 아직도 우리 학교가 내 학교라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 인정하지 못한 모양이다. 초점이 없거나 심히 반항적인 수많은 눈동자들을 견뎌내는 방법을 이제부터 배워야 한다. 왜? 누군가는 평생 올 일이 없는 이 모진 곳에 하필 왜 내가? 나는 아직도 억울했다.
"그냥 애들이 인문계랑은 정말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아주 많이요."
단순히 수업을 듣고 안듣고를 떠나, 여기 애들은 미래에 대한 의욕도, 당장 내일에 대한 기대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애들을 내가 어떻게 지도할 수 있을까. 뒤에 어떤 말을 더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부장님이 말씀하셨다. (부장님도 나와 같은 보통 교과를 담당하고 있다.)
"샘, 익숙해지려면 3월 한 달은 버텨야 할 거에요. 그 동안 많이 힘들 거구요. 저도 한동안은 매일이 충격의 연속이었어요."
한 달.
고작 하루 버티고 이리 마음이 복잡한데.
내 모든 학창시절까지 통틀어 제일 긴 한 달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