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던 합의가 논리적 공간으로 옮겨 가다
싱가포르에서 운영하는 온디맨드 버스 시범서비스에 대한 뉴스가 떴다.
요약하면, "Commuters can request pickups and drop-offs at any bus stop within adesignated area through a mobile app"이다.
콜택시처럼 버스를 부르는 서비스. 우리나라 '콜버스'라는 스타트업이 하려고 했던 바로 그 서비스와 동일하다. 불행하게도 콜버스는 규제와 이해관계자의 반발로 지금은 전세버스로 피벗하여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시계가 없던 시절 시계의 발명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있지 않아도 정해진 시간에 약속이라는 것을 해서 무엇인가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게 해줬다. 지도의 발명은 정해진 장소에 모일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 줬을 테다. 주소체계의 마련은 공간에 대한 약속을 더 정교하게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시간이 1초로 측정되던 1분으로 측정되던 시간에는 그런 간격이 없이 흘러가지만 사람들은 시간에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가상의 선을 그어서 약속을 했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지도 상의 경계와 주소 따위는 대부분 문서상에 존재하는 가상의 개념들이다.
한편, 가격은 수요자와 공급자의 흥정이라는 협상 과정을 거쳐야 할 수도 있지만, 공공서비스일 경우 정부가 강제로 정해서 사전에 약속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가격) 공급하느냐에 대한 약속이 얼마나 잘 이루어지느냐는 마치 물리학에서 접하는 마찰처럼, 경제를 얼마나 매끄럽게 움직일 수 있느냐를 좌우하는 요인이다. 거래비용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약속, 다시 말해서 계약 당사자간의 합의에 대한 것이다.
이런 약속이 과거에는 물리적인 영역에서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은 이른바 '사이버 스페이스(cyber space;가상공간)'를 통해서 시간, 공간 따위에 대한 합의점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노선을 정하고, 정류장을 정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합의를 사전적으로 강제함으로써 운송서비스의 규모의 경제를 달성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기차가 그랬고, 시외버스가 그러하며, 시내버스가 그렇다.
노선은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좋은 방법이지만, 유연성이 떨어진다. 다수의 사람들은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지만, 어떤 사람은 조기출근, 어떤 사람은 야근한다. 다수의 사람은 시내로 출근하고, 교외로 퇴근하지만, 어떤 사람은 반대일 수 있다. 정해진 노선으로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운송수단이 만족시키지 못하는 운송 수요가 존재하는 것.
자가용이 이러한 수요에 대응하는 주요 운송 서비스가 될 수 있지만, 모두가 출퇴근에 자가용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한 사정들이 다 있는 것. 렌트, 리스 등도 존재.
이를 대신해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도시 운송수단이 노선 대신 사업구역(나와바리)을 정해놓고 정류장 없이 사람을 태우고 내려주는 택시다. 옛날에는 택시가 많이 지나갈 법한 곳에서 손을 들고 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콜택시로 수요를 파악해서 공급하는 방식이 존재하다가, 지금은 앱을 통해서 이런 수요 공급이 매칭되고 있다.
'앱'으로 하는 택시. '앱'은 어떻게 보면 예전부터 있던 응용소프트웨어의 줄임말에 불과할 수 있지만, '앱'이라는 것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모바일 시대가 열리고 나서부터다. 모바일은 간단히 말하면 움직이면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인터넷이 태동하던 시절이 <데스크탑 PC+유선 통신망(Fixed broadband)>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던 <고체 인터넷> 시절이었다면, 2000년대 <랩탑 PC+와이파이>의 <액체 인터넷> 시절을 거쳐, 2007년 아이폰 태동 이후 본격화된 모바일 시대, <스마트폰+무선인터넷>의 <기체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었다. (IoT는 <플라즈마 인터넷>???)
<고체 인터넷>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이버 스페이스(가상공간)는 액체를 지나 언제 어디서든 '숨 쉬듯이' 접속할 수 있는 <기체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사람들의 일상과 상거래 활동의 변방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중심으로 급부상한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이 일상화되면서, 많은 오프라인 접점들이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것이 대표적인 현상이다.
-레코드나 테이프나 종이에 담긴 콘텐츠를 소비하던 사람들은 이제 인터넷으로 실시간으로 꺼내 듣는다.(스트리밍 서비스)
-많은 대면 서비스들이 온라인으로 넘어간다.(전자상거래, 인터넷뱅킹 등등)
-오프라인으로만 머물러 있던 서비스들에 온라인이 가세한다.(O2O 서비스)
과거 시계, 지도, 주소 등등으로 시간과 공간을 약속해서 수요와 공급을 매칭 했던 사람들은 이제 사이버 스페이스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만나서 실시간으로 주문하고 공급한다. 온디맨드 서비스들은 결국 <기체 인터넷>이라는 인프라의 확대가 가능하게 해 준다. 시계, 지도, 마켓플레이스 등이 앱으로 구현되어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물리적 공간에서는 노선을 짜고, 정류장을 설치하는 것이 돈이 많이 들고, 변경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면, 가상의 공간에서는 언제든 노선과 정류장을 만들어서 버스를 불러올 수 있게 된다.
노선과 떼기 힘들었던 버스가 구역을 넘어 온디맨드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메타포 삼아서 다른 산업에도 적용해 보면, <기체 인터넷> 시대가 다수의 전통산업을 어떤 식으로 바꾸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오프라인 유통체인들이 잡고 있던 전통 유통업은 비슷한 방식으로 전자상거래(리테일 테크) 업체에게 고객을 뺏기고 있다.
오프라인 지점 채널을 장악하고 있던 전통 은행은 비슷한 방식으로 핀테크 기업에게 고객을 뺏기고 있다.
서점은 이제 책을 파는 공간에서 문화를 파는 공간으로 바뀌었다.(책 구매는 온라인이 훨씬 싸고, 편하다)
물리적 공간에서 규모의 경제를 핵심으로 작동했던 많은 비즈니스 모델들이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층위의 경제 공간에 발을 디디고 있는 기업들과 경쟁하는 시대다.
시간, 공간, 가격 등의 계약 조건을 예전보다 쉽게 합의할 수 있는 시대. 물리적 마찰이 없는 논리적 공간, 즉, 사이버 스페이스 상에서는 경제적 마찰도 zero에 수렴한다. 고객의 수요와 기업의 공급, 유통 방식이 자연스레 바뀌어 가는 시대다. 과거의 기술을 상정하고 만들어졌던 여러 규제들이 과거의 환경에 맞는 룰이었다면, 지금은 지금에 맞는 룰을 업데이트하는 것을 넘어서, 갈수록 빠르게 변화할 기술의 발전을 능동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스마트한 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 이러한 룰의 핵심 분은 어떻게 승자와 패자의 이익을 모두가 동의하는 수준으로 동태적으로 배분할 수 있느냐가 될 터인데... 시장의 가격이나 판결로는 쉽게 가리기 힘든 주관적인 영역이라 쉽사리 답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결국 이를 잘 풀어야 기술과 인재들의 잠재력이 발휘될 수 있는 경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