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콜리 너마저의 <보편적인 노래>와 <유자차> 그리고 <속물들>
얼마 전 친구와 취기가 오른 채로 코인 노래방(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동전 노래방도 상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에 다녀왔다. 코인 노래방을 둘이 가게 되면 기필코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들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는 암묵적인 법칙이 있다. 전 사람의 선곡에 따라 후발 주자의 선곡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가슴 찢어지는 발라드 뒤에 고막을 찢을 듯한 록 음악이 용인될 수 있는 순간은 “아 이 분위기라면 노래방 바닥까지 꺼져버리겠다.” 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합의 하에 장르가 변경될 때다. 상대방이 열창할 때 무관심하게 핸드폰에만 열중하는 사람도 넌센스지만 이 법칙을 묵과하는 사람과 코인 노래방을 다시 가게 될 일이 있다면 단칼에 거절까지는 못하겠지만 심각한 고려 대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친구와 나는 음악적 취향이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내가 빈지노의 느낌을 추구한다면 친구는 검정치마의 느낌이랄까. 그러나 노래방에서 만큼은 배려와 관용이 싹튼다. 내가 빈지노의 <Aqua Man>을 부르면 친구의 다음 곡은 기리보이의 <호구>가, 친구가 검정치마의 <나랑 아니면>을 부르면 나의 다음 곡은 윤딴딴의 <겨울을 걷는다>로 예약된다. 노래방에서의 상생이자 서로의 플레이리스트를 채워갔던 방법이다.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 덕분에 이름은 생소하지만 음악은 많이 들어본 가수를 알게 될 때도 있고,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음악을 상기하게 되거나 알던 가수의 다른 음악들을 찾아 듣게 될 때도 있다. 브로콜리 너마저가 그랬다. 친구가 검색창에 입력한 가수명 브.로.콜.리.너.마.저. 내 머리 속 주기억장치에 입력된 건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의 <유자차>가 전부였으나 <보편적인 노래>의 인트로가 흘러나오고 보컬 부분으로 넘어가는 순간 보조기억장치에서 “이건 아는 노래다”라는 신호를 줌과 동시에 후렴구를 흥얼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편적인 노래가 되어
보편적인 날들이 되어
보편적인 일들이 되어
함께한 시간도 장소도
마음도 기억나지 않는
보편적인 사랑의 노래
- <보편적인 노래> 중
꾸밈없는 단어들로 채워진 가사를 보고 더욱 쉽게 공감을 하고 이입한다. 친구에게 검정치마의 어디가 좋냐 물었더니 “잔잔하고 변태같은 멜로디와 더불어 그저 미쳐버린 가사”라는 답변을 들은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누군가를 위로하기 보다는 보통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가사로 풀어낸다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곡 또한 변태 같은 멜로디까지는 아니지만 잔잔한 멜로디와 더불어 솔직한 가사를 지향하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너무 울고 싶어서 인터넷에 ‘울고 싶을 때 듣는 노래’를 검색했다가 브로콜리 너마저의 <울지마>를 듣고 홀딱 빠져버린 사람도 있고, 헤어진 여자친구가 즐겨 듣던 <유자차>의 가사를 떠올리며 괜시리 바닥에 남은 차가운 껍질에 다시 한 번 (눈)물을 부어 마셔본 사람도 있을 정도로 가사의 힘은 엄청나다.
바닥에 남은 차가운 껍질에
뜨거운 눈물을 부어
그만큼 달콤하지는 않지만
울지 않을 수 있어
온기가 필요했잖아
이제는 지친 마음을 쉬어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유자차> 중
일상에 달라붙어버린 음악은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론 이 계절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유자차를 떠올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무리일 테지만 <유자차>는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을 바라볼 때 즈음이면 떠오르는 곡으로 완벽히 자리 메김을 하고 있다. 모든 계절, 모든 순간에 찾아오는 곡은 아니지만 겨울 지나 봄을 바라볼 때 즈음 떠오르는 곡이라는 것이 너무나 매력적이지 않은가. 어느 부분에서 어느 정도로 그 곡에 빠져 들었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백 명이 있다면 백 명의 일상이 제각기 다르듯이 하나의 곡은 단순히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백 개의 곡이 되고 천 개의 곡이 된다. 덤덤히 사랑을 얘기하고, 지나간 계절을 떠올리며 청춘의 희노애락을 이야기했던 그들이 2010년 2집 앨범 <졸업> 이후로 9년만에 3집 앨범 <속물들>로 돌아왔다.(2012년 발매된 골든-힛트 모음집은 제외한다) 9년이 지난 지금은 삶에 지친 어른 냄새 물씬 풍기는 9곡들이 담겨있다. 9년의 시간동안 9곡이라니 너무 적은 것 아니냐는 의견도 분분하지만 곡 하나하나 그들 스스로 절제하고 억누른 기색이 역력하다.
언제나 도망치고 있지만
꽤 비싼 연극은 언제나 빈 자리가 없고
어쩔 수 없는 일도 너무 많다네
그래 우리는 속물들
어쩔 수 없는 겁쟁이들
언제나 도망치고 있지만
꽤 비싼 건물은 언제나 빈 자리가 없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져
꽤 비싼 건물도 요즘은 빈 자리가 많다고
하지만
그런 거라도 가지고 싶어
- <속물들> 중
2007년 데뷔한 후 어느새 10년이 훌쩍 지났고 어엿한 중견밴드로 잡은 브로콜리 너마저. 중견밴드로 불리우는 것이 조금은 쑥쓰럽고 익숙치 않은 듯 하나 우리나라 인디 음악의 한 부분을 이끌어 온 밴드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려운 말로 이별을 그리고, 사랑을 표현하고, 현실을 얘기하기 보다는 보편적인 언어로 우리의 일상에 뿌리내린 그들의 노래를, 새 앨범을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