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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훈 Jul 22. 2021

필립 로스의 <울분>과<에브리맨>

그리고 함께 보면 좋을 영화


<울분>


대학생, 걱정이 많은 아버지, 남학생 사교클럽, 이성과의 교제, 그리고 룸메이트와의 갈등. 대학 신입생의 좌충우돌 성장기가 그려지는 키워드에 “한국전쟁”이라는 파편이 얹어진 후에 서사가 나아가는 방향이 꽤나 흥미롭다. 각각의 키워드는 적당한 선에서 그치기보다는 심각한 수준에서 다뤄진다. 이를테면,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걱정은 지나치다. 유대교도로서 정육점을 운영하던 건실한 아버지가 일순간에 아들의 통금시간을 간섭하며 집의 앞뒷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하러 밖에 나간 아들을 찾으러 사방을 돌아다닌다. 이에 질릴 대로 질려버린 주인공 마커스가 고향인 뉴저지주를 벗어나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와인스버그 대학으로 편입함에 따라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과 사고들이 서사의 주를 이루고 있는데, 새로이 정착한 곳에서는 학업에 전념하며 그만의 생활을 이어가고자 하지만 그 역시 쉽지가 않다. 두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작품의 챕터 간 비중이 95대 5의 비율을 이루고 있는 점도 작품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서, 빈도가 적지만 중간중간 갑작스럽게 틈입하는 “중공군의 군가”에 대한 주인공의 집착은 전쟁의 이미지에 대한 환기의 역할보다는 작품의 첫 번째 챕터와 두 번째 챕터를 연결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문장은 꽤나 직설적이며, 마커스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묘사의 방식이 깊은 몰입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안으로 계속해서 파고드는 느낌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파고들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마커스가 보이는 행동양식과 그에 따른 작품의 결과를 지켜보는 것 또한 주된 탐독 포인트가 된다. 작품의 초반에는 인내하는 모습을 보이며 내면적으로 감정을 삭이던 마커스가 학과장과의 면담에서 보여주는 통제 불가능한 면모는 아버지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표면적으로는 면담의 형태지만 싸움의 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부분은 전체의 8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울분”의 형태를 긴 호흡으로 서슴없이 표현하고 있다. 필립 로스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 접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적지 않은 충격과 신선함을 전해준 작품이 됐다. 분량이 짧은 편이기 때문에 700페이지가 넘는 그의 대표작 <새버스의 극장>을 읽기 전에 준비 운동으로써 이 작품을 접하기에는 꽤나 괜찮은 선택이 아닐까 싶다.




<에브리맨>


<울분>보다 2년 앞서 발표된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점잖게 말하면 한결 차분하고, 나쁘게 말하면 지루하다. 시점의 전환도 잦고, 등장인물의 수도 적지 않은 편으로써 조금만 집중력을 잃는다면 작품의 흐름을 놓치기 쉽다. 시종일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는 작품으로써, “그”의 장례식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주인공인 “그”의 남다른 가족력과 결부되어 회상과 회귀. 아니 이미 관 속에 들어가 회귀가 불가능한 그의 서사는 과거 시점에서 자유로이 이동하며 3인칭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주인공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울분>처럼 자극적이고 몰입도가 높은 작품은 아님이 분명하나 짧은 분량 안에 죽음의 이미지를 이토록 가득 담아낸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유년 시절에는 탈장 수술로 입원했을 당시 옆 침대에 있던 소년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날,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첫 번째였을 죽음에 대한 환상이 찾아왔다. 서른 넷이라는 이른 나이에는 충수염에 걸렸다가 첫 번째로 진정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다. 처음에는 죽음에서 벗어난 기쁨이 먼저였지만, 세월을 거듭할수록 노쇠하고 병약해지는 자신을 부정하듯이 그는 젊음과 활력을 탐닉하며 이혼과 재혼을 일삼는다.


<에브리맨>. 이 책을 완독하게 된다면 보통의 사람을 뜻하는 이 단어가 어떤 의미로 작품에 차용됐는지 곱씹어 보게 된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툭 하고 떨어진 죽음이 아닌, 여러 차례에 걸친 대수술과 회복에 걸쳐 결국에는 점진적으로 죽음에 다가가는 그의 삶이 보통의 사람들이 맞이하는 보통의 죽음으로 치환될 수 있을까? 젊음과 활력을 탐하며 외도를 일삼던 그가 좀 더 건강한 신체, 보통의 가정, 보통의 삶을 염원할 것일까? 옮긴이의 말에 적힌 것처럼 이 작품이 주는 가장 서늘하고 섬뜩한 공포는 어떤 삶을 살든 간에, 그 끝이 죽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함께보면 좋을 영화>


1. <스틸 라이프(2013)>



네이버 영화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장례를 치뤄주는 런던 케닝턴 구청 소속의 22년차 공무원 존 메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장례식임에도 불구하고 고인의 마지막 순간을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 단조로운 플롯과 시종일관 잔잔한 톤과 매너는 <에브리맨>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데, 상당히 충격적인 결말에 충격받지 않도록 주의할 것.



2.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




죽음보다는 "삶"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매력적인 영화.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순간이 사랑스럽고도 안타까워서 눈을 뗄 수 없는 작품. 서로가 시간의 양 극단에서 출발해서 양 극단에서 끝난다. 서로 스쳐갈 수 밖에 없는 타임라인 속에서 엉켰다가 풀어져가는 관계를 야속하고도 담담하게 그려낸다. 아직 안 봤다면 아끼지 말고 꼭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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