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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작품과 어려운 작품을 분류하는 것이 실로 의미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데뷔작인 <키친>만큼은 책장을 술술 넘길 수 있는, 진입장벽이 그리 높지 않은 소설임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는 <키친>뿐만이 아닌 그녀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으로써, '읽는 사람이 책을 덮으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소설'을 쓴다는 그녀의 말에서도 작품의 분위기 내지는 필치를 짐작해낼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이 술술 읽히는 것이 다루는 주제 또한 가볍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죽음으로부터 오는 내면의 상처와 치유의 과정을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한 일상의 언어로 그려내고 있기에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 뿐, 인물들이 개별적으로 지니고 있는 전사와 감정들을 나열한다면 영화 한 편은 거뜬히 그려낼 수 있을 정도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단행본 <키친>은 세 개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단편인 <키친>과 두 번째 단편 <만월>은 특정 사건을 전후로 이어진 하나의 소설로 봐도 무방하다. (세 번째 단편 <달빛 그림자> 또한 매력적인 작품이나앞선 두 작품을 차분히 읽어낸 후에 느껴지는 잔상이 세 번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서 리뷰에서는 배제하였다.) 작품은 초반부터 주인공인 사쿠라이 미카게와 주변 인물들에게 가혹한 시련과 독특한 설정을 부여한다. 미카게는 어렸을 적엔 부모님을 잃고 중학교 들어갈 무렵에는 할아버지를, 불과 며칠 전에는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룬 대학교 휴학생이다. 혈육을 모두 잃고 상실감에 젖은 그녀를 거두어준 유이치와 그의 '어머니' 에리코씨에게도 남모를 사정이 있는데, 에리코씨는 원래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였다는 점이다. 또한, 소설의 제목처럼 미카게에게 부엌이라는 공간은 심리적 안정을 취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인물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는데 <키친>이라는 제목이 풍기는 이미지가 우리에게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다. <리틀 포레스트>나 <카모메 식당>등에서 보여준 일본 특유의 차분함과 정갈함 그리고 위트마저 조용한 작품들이 이미 요리와 치유의 과정을 접목시켰고, 시간을 더욱 거슬러 올라간다면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가 현대인에게 심어준 다다미방 특유의 감성이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클리셰로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이런 장치들이 작중 드문드문 묻어나기는 하지만 미카게와 비슷한 아픔을 지닌 또다른 인물인 유이치와 에리코씨가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온의 것에 가깝다.
반복된 상실을 미온의 온도를 유지한 채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서 우울함의 감도마저 무디게 느껴진다. 기쁨, 슬픔, 그리고 사랑이라고 불리워야 마땅한 감정들은 상실이 가져오는 거대한 고독 앞에서 부인되고 휩쓸려나간다. 글로 읽고 있음에도 인물들이 억누르고 있는 감정과 짓고 있을 표정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소설 속 갈등의 부재는 역설적이게도 공허한 감정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데, 수면 위를 떠다니던 공허함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로부터 스멀스멀 차오르는, 소위 감정의 대류현상이 일어날 때 요시모토 바나나의 담담함의 미학은 절정에 다다르고 작품도 완결로써 다가간다.
상실로 인한 상처와 계속되는 일상 그리고 치유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함께하면 좋을 영화로 선정했다. 상처를 보듬고, 과거를 잊고, 완치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려낸 영화는 아니다. 아물 수 없을 것 같은 상처가 적어도 흉터로는 남을 수 있게 꿰메고, 덧붙이는 수술의 과정에 빗대는게 더욱 적절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이 일상의 무미건조함을 표출하는 방식이 소설 <키친>과는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영화가 상처를 다뤄내는 방식이 이토록 잔혹하고 한편으로는 아름다울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