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적 평가기준이 주는 모호함
2021년 초, 구직자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비대면으로도 세상이 돌아간다는 걸 1년간 체득한 덕분이었다. 기업들도 온라인 설명회와 면접회를 열기 시작했고, 구직자들도 "내년쯤엔 나갈 수 있겠지"라는 희망과 함께 다시 일본 취업 시장을 두드렸다.
그해 초에 만난 전영태 씨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영어영문학과 출신에 방황이 길었던 친구. 2019년 홋카이도 여행 중 하코다테 야경을 보며 '한국에서만 갇혀 살기엔 인생이 아깝다'라고 생각해 2020년 초 삿포로에서 워킹홀리데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채 3개월도 안 돼 세상이 멈췄다. 코로나였다.
하지만 영태 씨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오프라인 채용이 그대로 온라인으로 옮겨간 것. 설명회, 적성검사, 면접 모두 인터넷만 연결되면 가능했다.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이었다.
전형은 잘 진행되는 것 같았다. 문과생의 미덕대로 업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넣었지만, 묘하게 내정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코로나 때문에 채용이 줄어서"라고 생각했지만, 케이스가 쌓이자 심적으로 버티기 힘들어졌다.
한국처럼 "스펙이 부족해서"라면 납득이라도 되는데, 일본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게 더 답답했다.
2020년 말, 영태 씨가 나에게 상담을 신청한 이유였다.
경험이나 엔트리시트를 보니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다. 아르바이트, 대외활동, 서클 활동도 다양했고 일본어도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부족했다. '캐릭터'의 부재.
"영태 씨, 본인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어떤 캐릭터예요? 어떻게 기업에 보이고 싶어요?"
"그건 기업에 맞춰서 구성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일견 맞는 말이다. 기업마다 인재상이 있으니까.
"지금까지 넣은 회사들 좀 볼게요."
업계로만 봐도 제조업, IT, 컨설팅, 식품 등 정말 다양했다.
"각 회사마다 다른 캐릭터로 쓰셨죠?"
"네, 당연히 인재상에 맞춰서..."
"그럼 진짜 영태 씨는 누구예요?"
영태 씨는 대답하지 못했다.
"기업에 맞추기 전에 양보할 수 없는 나의 캐릭터가 먼저 있어야 해요. 카멜레온처럼 회사마다 색깔을 바꾸면, 회사 입장에서는 축이 없는 사람으로 보여요."
우리는 그날 영태 씨의 진짜 캐릭터를 찾았다. 한일 교류 활동에서 한국 문화를 소개했던 것, 보컬 동아리 공연을 기획했던 것, SNS에 여행 콘텐츠를 올렸던 것...
"공통점이 보이세요? 무언가를 만들어서 주변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 이게 영태 씨 캐릭터예요. 이걸로 모든 회사에 일관되게 쓰되, 어떻게 발휘할 건지만 다르게 쓰는 거죠."
그런데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제가 최종면접만 가면 자꾸 떨어져요. 다섯 번이나 떨어졌는데 제가 뭐가 부족한 걸까요?"
"최종까지 갔다는 건 능력은 인정받은 거예요. 그런데도 떨어졌다는 건, 서로 안 맞았다는 거죠."
"그럼 계속 안 맞는 회사만 만나면요?"
"채용이 뭔지 아세요? 회사가 지원자를 평가하는 것만큼, 지원자도 회사를 평가하는 거예요. 서로 맞으면 채용, 안 맞으면 인연 없음. 최종 불합격은 실패가 아니라 적합도 불일치예요."
영태 씨는 한참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섯 번 면접 보면서 다섯 개 회사를 경험했고, 자기소개를 다듬었고, 성장했어요. 결과와 관계없이 그 자체가 가치예요. 다음부터는 '이 회사가 나랑 맞나?'를 생각하면서 가보세요."
2개월 후, 영태 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도쿄 IT 스타트업 홍보 담당으로 합격했다고.
"마지막 면접은 전혀 안 떨렸어요. '여기 나랑 맞나 어디 한번 보자'라는 마음으로 갔는데, 오히려 제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었어요."
"축하드려요."
"그리고 깨달은 게 있어요. 제가 떨어진 회사들, 사실 저도 별로였던 것 같아요. 면접 보면서 확신이 없었거든요. 회사도 저를 원하지 않았고, 저도 그 회사를 원하지 않았서 그렇게 자꾸 최종에서 떨어졌나 봐요."
코로나 시기에는 구직자들은 더욱 절박했다. 그래서 영태 씨처럼 "일단 어디든 붙자"라는 생각이 강한 케이스가 더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독이 됐다. 축이 없어 보였고, 어디에도 맞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불합격을 '실패'로 받아들이면서 자신감을 잃었다.
집에 도착해 맥주 한 캔을 땄다.
스펙 채용이 아니니까 쉬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다. 떨어진 이유가 명확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게 본질이다. 채용은 점수 맞추기가 아니라 서로 맞는 파트너 찾기다. 점수가 높다고 무조건 붙는 게 아니다. 애초에 점수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술이 살짝 모자라 맥주를 한 캔 더 땄다. 쓰면서도 개운한 맛이었다.
2021년 하반기, 도쿄 현지 사무소의 담당자가 건강 악화로 귀국하게 되었다. 갑자기 공석이 되어버렸고 자연스럽게 나에게 후임 제안이 들어왔다.
"학찬 씨, 도쿄 가실 생각 있으세요?"
솔직히 코로나가 종식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도 만류했다. "굳이 해외에서 고생할 필요 있냐"라고.
하지만 이상했다. 공공기관 행정직으로 조용히 살던 내가, 소싯적 오타쿠 시절 재미로 딴 JLPT 때문에 덜컥 일본 취업 담당이 된 지 3년, 처음으로 일이 재미있었다. 업무로서의 충실감이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그곳에서 끝장을 보면 내가 정말 이 일을 좋아하는지, 이게 진짜 내 길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가겠습니다."
그리고 2022년 3월,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일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 창작물에 담긴 이야기들은 저자가 2018년부터 일본 취업 컨설팅 업무를 수행하며 직접 경험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합니다. 조언의 내용과 인사이트는 실제 컨설팅 과정에서 얻은 것이지만, 등장인물의 이름, 학교, 회사명 등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변경하거나 각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