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침범 그 후! 티티새 다과회 - 하 -

<다른 사람의 컵>을 돌려드립니다

by 팀 티티새

파인의 컵 <Fuckboy를 위하여>

제인의 티백 <원래 사랑하는 애들만이 말을 아낀(닥친)다>

승혜의 티백 <백합의 꽃말>





승혜: 우선 세 작품 다 레즈비언이 주인공이라는 게 주목할 점이에요.

파인: 그러니까요.

제인: 아무래도 컵에서 고윤과 민경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아요.RILI는 윗선의 음모로 헤테로 커플 위주로만 매칭을 해주잖아요. 퀴어를 배척하는 것도 세계관이라고 받아들여서 동시대의 퀴어 이야기를 쓰게 된 것 같기도 해요.

승혜: 동의해요.

파인: 동시대 이야기라는 점도 재미있는데, 제 컵은 유일하게 모든 작가가 시간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어요. 일에 전후가 있다기보다는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이 읽혀요.

승혜: 대표가 철컹철컹 잡혀가 버렸기 때문에 RILI 앱을 이용하려면 컵과 같은 시간대에 존재해야 하는 면도 있고, 컵의 분위기가 시트콤이나 브이로그처럼 현실감이 있어서 옆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 같은 동시성을 빌려오게 되었나봐요.


파인: <원래 사랑하는 애들만이 말을 아낀(닥친)다>에서 집배원인 큐가 귀여워요.

제인: 큐는 정말 귀여운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업무용 오토바이까지 빼앗긴 채로 성실하게 우체통에 가서 가장 먼저 편지를 발견하게 되죠. 큐에게도 소식을 알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고윤이 민경에게 쓴 편지를 본 순간 본인이 듣고 싶은 말이라고 느껴서 편지를 더 소중히 했을 거예요. 큐도 지연에게 단지 안부 인사를 바랐을 거니까요.


파인: <Fuckboy를 위하여>도 그렇고 연하들만 적극적이네요.

제인: 적극 연하 세계관. 연하가 활기차죠. 짝사랑을 하는 쪽이 언제나 애태우고, 그러면서 활기도 있고, 언니들은 보통 지쳐있고 거짓말을 해요. 외람된 말이지만 제가 옛날에 같이 주짓수를 배우면서 좋아하던 언니가 있었는데 그 사람도 이런 스타일이었어요.


파인: 큐가 키치앤디더온이라는 회사를 다니는데 이름부터 흥미로워요.

제인: 비하인드를 말하자면 제가 ‘사랑스런 신을 위한 DIY 안내서’라는 희곡을 썼는데, 거기에 나오는 사이비 종교 이름이 키치앤디더온이에요. 큐가 다니는 회사로서 어떤 곳인지 소개하자면 아날로그나 빈티지에 관련된 것은 다 하는 회사예요. 엽서라든지 다이어리, 실링 왁스, 남산에 걸 커플 자물쇠 등 온갖 걸 파는 중견기업 느낌이에요. 몇몇 제품은 영풍문고에 입점될 정도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어요.

파인: 우체국이라는 건 없겠죠?
승혜: 아무래도 우체통도 서울에 딱 하나 남았고 심지어 배달할 편지가 6개월에 하나면 없어지겠죠?

제인: 사기업 위탁이죠.

파인: 그래도 어엿한 회사원인데, 큐의 직업인 우편 집배원은 RILI에서 35mm 필름 제조업자, 연금술사와 함께 분류되는 건 너무 웃기고 속상한데요.

제인: 우편이 오가지 않다보니 우편 집배원이라는 직업은 버스 안내양처럼 사라지고 있어요. 소수이다보니 같은 분류로 묶이지만 연금술사보다는 현대적이에요.


파인: <Fuckboy를 위하여>의 포니처럼 신경을 긁는 상사가 나와요.

제인: 홍대리는 진짜 킹받는 존재죠. 내세울 게 릴리 밖에 없는 사람.

파인: 되도 않는 권위에 자아 의탁하는 모습이 인셀의 전형 같아요.

승혜: 궁금한 게 있는데 애초에 큐가 번듯한 직장인으로 설정된 건 고윤이 가지고 있었던 여의도 직장인 느낌의 영향이 큰가요?

제인: 그렇죠. 고윤의 회사보다는 중심가에서 좀 떨어진 어느 사무실에 큐 같은 사람이 있을 것 같았어요. 다르게 말하면 고윤과 큐는 지나가다 스쳤을 수도 있어요.


제인: 작년에 쓴 근미래 SF 희곡을 최근에 우연히 꺼내봤는데 “별반 변한 것은 없다. 여름이 조금 더 더워지고…” 이런 묘사가 있더라고요. 조금 우울할 정도로 변한 게 없다는 점에서 파인이 상상했던 근미래의 서울이 제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도 비슷해요.

파인: 일상적인 과학이 많이 발전했잖아요. 스마트 워치도 있고, 레시피 알려주는 냉장고도 있고. 그런데도 여전히 서울은 회색이고 십 년, 이십 년이 지난다고 해서 이 풍경이 크게 바뀔까 하는 회의감 내지 우울감이 있어요.

제인: 우리는 다 손목에 애플워치를 찬 불행한 사람이 되는 거죠.


파인: 지연과 큐는 찐사랑인가요, 그저 지난 인연인가요?

승혜: 매칭률이 32%라 해석의 여지가 있는데, 출생률 때문에 RILI가 보정하는 걸 생각하면 60% 정도가 아닐까요?

제인: 그 정도 될지도 모르지만 결론적으로는 큐의 짝사랑이에요. 이 로맨스의 중점은 내 추억 속 인물이 실제로는 되게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는 거예요.

파인: 5.8km면 마음 먹으면 쉽게 만날 수도 있는 거리네요?

제인: 예를 들어 내 첫사랑이 미국에 있는 줄 알았는데 옆집에 있대, 같은 당황스러움. 차라리 미국에 갔으면 이해를 하겠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모른 척 연락도 없었다니 괘씸하지 않나요? 교훈은 ‘언니를 믿지 말자’입니다.


파인: <백합의 꽃말>에서 경아의 데이트 상대가 굉장히 다양한데, 릴리가 경아와 짝지어주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승혜: 릴리 입장에서는 처음 만난 대기업 남성이 이상적이었을 거예요. 판교 부부마냥 딱히 케미스트리는 없고 인위적이지만 경아의 나이와 상대의 경제적인 안정 등 조건을 고려해서요. 그런데 몇 번 매치업을 해줘도 잘 안 되니 릴리의 알고리즘이 경아가 특이 취향인가- 하고 살짝은 감성적인 남자도 추천해줘보는 거죠. (웃음)


파인: 경아가 자신이 외계인의 후손이라고 믿는 것은 퀴어 정체감에 대한 비유에 가까울까요?

승혜: SF 단편집을 내면서 한 편 정도는 외계인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경아가 아버지의 자필 편지를 받은 것도 극중 사실이고, 릴리를 쓰면서 외계인의 후손임을 말한 것도 맞지만 분석적으로 보면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파인: 경아는 바이인가요?

승혜: 그럴 수도 있고, 정체성은 열어 두었어요. 확실한 것은 동성혼 법제화도 안됐으면서 괜히 쿨한 척 하는 게 웃기다고 생각하는 퀴어 당사자예요.

파인: 아버지의 편지에 따르면 외계인의 피는 모계 유전되다가 경아 아버지만 거쳐서 경아에게로 왔어요. 이 점에서 경아 아버지가 퀴어 당사자라고 봐도 될까요?

승혜: 안 될 건 없죠. 그런데 아버지가 특별한 존재로 나온 이유를 이실직고하면 제가 작품에서 어머니와 모계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써왔는데 이번에는 남성 인물을 포함하면서 색다르게 분위기를 환기해보고 싶었어요. (웃음) 작가 개인의 시도에 가깝습니다.


파인: 지난 번에 블로그에 릴리 만남 후기를 남긴다는 설정을 가지고 함께 이야기했었죠. 그때 계획에 비해 경아의 블로그는 순한 맛이에요.

제인: 맞아요. 사실 이런 블로그들을 보면 상대들을 인간으로서 대한다기 보다 품평하는 경우도 많은데, 경아는 예의를 차려서 인격체로 대우해주더라고요. 경아 되게 착한 사람 같아요.

승혜: 제가 데이트앱을 안 써봐서 고증 실패로 그럴지도요. (웃음) 처음에는 릴리의 원리를 파헤치기 위해 분석하는 괴짜 블로그로 가려고 했지만 글을 쓰면서 경아가 생동감 있는 사람으로 발전되었어요. 자연스럽게 경아가 쓰는 후기도 나쁘지 않게 쓰게 됐어요.

파인: 그런데 원주는 경아의 블로그를 어떻게 찾은 거예요? 알고 보면 원주도 사이버 스토킹을 열심히 한다든가.

승헤: 원주는 단순히 고유 문장을 통해서 찾았어요. 경아는 유료 포스트이니까 그리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소소하게 구독자들이 있었을 뿐이에요.

제인: 경아가 블로그 제목 짓기를 고유 문장으로 한 게 순진했던 거죠.


승혜: <백합의 꽃말>은 퀴어가 어딘가는 존재한다고 막연히 생각하면서도 정작 우리가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 예를 들면 유치원 선생님이나 공무원은 아닐 것이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 방 먹이고 싶어 쓴 글이기도 해요. 한국에서 동성 혼인신고를 위해서 구청에 가면 옛날에는 접수조차 거부 당했는데 요즈음에는 공무원들이 접수를 도와주고, 반려 사유서 등을 준다는 소식을 봤어요. 혼인신고 서류를 건네받은 공무원도 퀴어로서 자신의 최선을 다해 노력했을 수도 있다, 어디에나 경아 같은 사람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유치원 선생님의 경우 어린이를 가르치기 때문에 보수적인 시선이 따라붙잖아요. 미혼의 여성이라면 여자친구는 물론 남자친구가 있는 것도 어린이들 앞에서 티내서는 안 된다든지. 그런 식으로 퀴어를 소거하고 검열하면서도 게이에 관한 농담은 재미로 소비하는 사회는 모순적이라고 생각해요.






세계관 침범 그 후! 티티새 다과회 마침.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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