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시&노트

by 여상

[봄비]


비 오는 아침,

명랑한 새소리가 들리지 않아

조금 슬퍼지려다가

창문을 열고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봅니다.


바다 건너 남쪽나라에는 벌써

연두잎이 펼쳐지고,

꽃몽우리가 열리고 있다는,

두근두근한 소식이 차근차근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 메말랐던 대지 위로요.


빗금 사이사이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검은 땅에는 초록이 움트고

잠을 깬 들친구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고요,

얕은 물속에는 치어들이

처음 가져본 은빛 비늘을

서로 놀라며 견주어 봅니다.


모유를 양껏 마신 아가처럼

맑은 연둣빛 혈색으로

말랑말랑해진 팔을 흔드는

나무들, 나무들.


산과 들과 마을의 사연을

그러모은 물안개가

구름이 되어

북쪽 마을 어딘가에 또

이 촉촉한 소식을 전해주러 가겠지요?


나의 소식은 어디쯤에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대 소식은 요?






Poet's note

어젯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맥주를 얻으려 밤거리를 나섰다. 짙은 어둠 때문에 모르고 있다가, 콧등을 간지럽히는 것이 안개처럼 미세한 비의 입자인 것을 알았다. 맥주를 구해 돌아오는 길, 외로운 가로등 불빛에 빗금을 그으며 내리는 보슬비가 낭만적이라고 느꼈다.


요사이 글을 짓고, 자작글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푹 빠져 있다. 그저 흥미로 시작한 일이고,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책상머리를 지키며 꾸벅 졸다가 고개를 드니 어느덧 새벽 4시를 넘기고 있었다.


기분 좋은 빗소리에 깨어났다. 차분하게 내리는 봄비를 즐기고 싶어서 커피잔을 들고 나선 테라스, 가느다란 빗금 너머로 아직 떠나지 않은 물안개가 아련하게 개천과 숲을 감싸고 있었다. 내리는 빗소리와 흐르는 물소리가 절묘하게 화음을 이루고, 햇살 아래 수다스럽게 지저귀던 새들이 비를 피해 둥지로 옹기종기 모여든 아침. 덕분에 고요한 빗소리에 젖은 봄날 아침의 정취!


남쪽나라에는 나무가 잎을 틔우고, 어떤 곳은 벌써 꽃을 피웠다는 소식을, 바다를 건너온 봄비가 전해주고 있었다.


개천의 얕은 물가에는 처음 세상과 마주한 치어들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물 속의 삶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들판에는 차갑지 않은 한 줄기 바람이 나이 든 나무와 어린 풀들을 흔들어 깨우고, 웅크린 들짐승과 잠자던 곤충들의 졸린 얼굴을 씻어 주며 속삭인다. "어서 일어나. 봄이 왔어!"


엄마의 따뜻한 모유를 먹은 아기처럼 봄비를 한껏 마신 대지가 여기저기에 새싹들을 내어 놓고, 연둣빛 혈색이 돌기 시작한 나뭇가지에는 몽우리들이 달구어져 가고 있었다. 고요의 이면에서 역동적으로 요동치는 生과 순환의 장엄한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 함께 꿈틀거리는 나의 '무엇'이 함께 느껴졌다. 아, 그것은 아마도 살고픈 기운!


차츰 비가 잦아들고, 산과 들과 마을의 사연을 담뿍 그러모은 물안개가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이 안개는 구름이 되어, 봄을 기다리는 북쪽 마을에 새소식을 전하러 갈 것이다.


빗방울이 수면에 자아낸 물둘레들이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일기장을 열어 이렇게 적어 두었다.

'오늘 아침,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기적을 보았다.'






#봄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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