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것에 대하여

시&노트

by 여상

[머무는 것에 대하여]


비가 내리고 안개 저 편으로

한 시절이 가고 있다


여기 내 앞을 무심히

스쳐가는 것이 있다

간 것은 다시 오리라

그리고 머무는 것이 있다


머뭇거리며 맴돌다가 끝내는

가고, 다시 오고

진눈깨비처럼 흩뿌려져

오지 않은 듯, 가지 않은 듯


* * *


풀꽃이 왜 오는지,

뜻이 없는 것은

오면 가고, 다시 오간다

이유가 있는 것이 머문다

오래도록 맴돌이를 한다


상흔이 머문다

쉽게 지울 수 없는 바램이

소용돌이치고, 다시

안개로 부서져 침착(沈著)하는 동안


기다린다

새들이 마시고 뱉어낸 하늘이

맑아진다

그러면 일없이 바람이 불고

네가 부유하다 투명해진다


속절없이 계절이

오고, 가고, 다시 온다





note


2월 하순,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 가운데 아직 차가운 기운이 바람 속에 남아있지만, 오늘 나의 산책은 확연히 봄의 길목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산마을의 들녘을 덮었던 설백의 문장들이 새봄의 행간으로 녹아 흐르고 있다.


습해진 흙 아래에선 겨우내 웅크렸던 뿌리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을 것이다. 추위를 버틴 겨울초들의 초록이 한결 밝아졌고, 어떤 것들은 쌀알 만한 꽃몽우리를 꺼내어 놓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시간이다. 한 발자국씩 조심스럽게 밟아 오는 계절의 순리는 이번 봄에도 어김없이 황홀한 제1막 1장을 보여줄 것이다. 이 순환의 리허설 무대에 서서, 나는 자연이 지닌 가장 고요한 철학, '자연스러움'의 비의(秘意)에 대해 생각한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거나 머뭇거리지 않는다. 풀꽃이 피고 지는 것, 안개가 피어올랐다 흩어지는 것, 말랐던 나뭇가지가 새 잎을 내어 놓거나, 날벌레들이 햇살 아래 빙글빙글 춤을 추는 것에는 거창한 명분이나 복잡한 이유가 없다. 이유가 없기에 그들의 발걸음은 가볍고, 가볍기에 막힘없이 순환한다. 오면 오고, 가면 또 가는 그 무심(無心)함! 이것이 곧 우주의 거대한 생명력이다.


인간의 삶은 조금 다르다. 흐르려는 순리와 붙잡으려 하는 욕망 사이의 팽팽한 긴장. 인간의 유위(有爲)적 욕망은 늘 자신을 둘러싼 우주에 긴장을 유발한다. 그 의도된 욕망이 우리를 계절의 바깥으로 배회하게 만든다.


마음속에는 늘 '욕망'이라는 이름의 닻이 깊게 박혀 있다. 닻의 다른 이름은 '이유'이다. 사랑에 머물러도 이유를 찾고, 상처에 휩쓸려도 그 까닭을 끈질기게 되묻는다. '바램'이 만들어낸 그 묵직한 '이유'의 무게 때문에, 우리는 보내야 할 계절을 보내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갇힘'의 시간을 보낸다. 어쩌면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에 스스로 부여한, 벗어 던지지 어려운 이유들 인지도 모른다.


상흔이 지워지지 않는 것은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한, 그래서 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았기 때문이다. '이유'가 남는 것이다. 잔재된 '이유'의 해소는 그 뜻이 다할 때까지 고요히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보내야 할 것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고, 머물러야 할 것은 그 의미가 다 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 묵직했던 상흔이 미세한 입자가 되어 날아가 버릴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이 내가 아는 최선의 위로이다. 그것을 무위(無爲)라 말하면 어떨까?


개천가의 강돌이 거친 물살에 씻겨 매끄러워지듯, 우리의 불편한 기억들도 결국에는 '내려 놓음'의 시간 속에서 안개처럼 가벼워질 것이다. 무게를 잃은 고통이 부유하다가 끝내 투명해지는 그 순간, 그때서야 비로소 '나'를 고집하던 에고(ego)의 사슬이 느슨해지고, 우리는 흐르는 계절의 순리 속으로 안온하게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이유를 버리고 '흐름'이라는 전체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일이다.


이제 곧 노란 꽃망울을 터뜨릴 산수유에게 '이번 봄에는 내가 너의 배경이 되어줄게'라고 속삭여 본다. 비가 그친 맑은 하늘이 불쑥 다가오고 햇살이 꽃잎처럼 부서져 날리는 참 아름다운 봄의 초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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