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을 하니 이제서야 보이고, 느껴진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3년 반 전에 읽고 썼던 내 서평을 봤다. 아마도 과거의 나는 이 거대한 명작 앞에 무엇인가를 느껴야만 한다는 '키치'적 압박감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단언컨대, 지금 한 독서의 절반 정도의 수준도 미치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지난날의 나에게 채찍질을 하기보다는 그때보다 더 많이, 깊게 느낄 수 있는 지금의 나에게 당근을 주고 싶다.
토마시,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각각의 인물의 서사와 스스로의 존재에 부과하고 싶은 경중을 주의 깊게 살펴 읽으니 전체 서사가 눈에 보이고, 보다 심층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이 각각 '존재의 가벼움/무거움을 추구했다'라고 일차원적 단언을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반대 욕구를 강하게 또는 약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던 토마시는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 그가 추구하던 존재의 가벼움은 다소 무거워졌으며, 유일한 존재를 선망하며 존재의 무거움을 추구하던 테레사는 토마시와 카레닌의 사랑을 통해 마침내 존재의 경중에 대한 집착을 탈피하게 된다. 사비나는 초지일관 존재의 가벼움을 추구하나, 가끔씩 한없이 가벼운 존재의 허무성을 인식하곤 한다. 프란츠는 존재의 무거움을 한없이 가벼운 존재의 사비나를 통해 마침내 한층 더 무거움을 더한다. 그들이 어떤 존재의 경중을 추구하냐 보다는, 추구의 과정 속 변화하는 그들의 마음을 추적하는 것이 이야기의 본질에 다가가는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없이 달리던 5부까지의 서사에 이어 6부, 7부는 철학적 사유의 정점을 달린다. 6부는 ‘키치’라는 개념, 7부는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에 대한 밀란 쿤데라의 사유가 녹아 있다.
키치란 강요된 감정 혹은 판단으로 이해하면 되는데, 배은망덕한 딸, 버림받은 아버지, 배신당한 조국, 첫사랑의 추억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선, 표면적 이미지로만 객관성을 져버린 채 호소하고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하는 가슴이 독재하는 미학적 이상이다. 명료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본질을 무시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리는 없겠다. 쿤데라는 이 키치라는 개념이 이성을 말살하고 감성이 통치하는 세계를 만든다고 보고, 사비나를 내세워 신랄하게 키치적인 모든 것들을 비판한다.
7부의 진정한 사랑은 반려견 카레닌을 통해 테레사의 입을 빌려 내세우는 주장으로, 주인과 반려견 사이에는 이해관계가 없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자발적 사랑이라는 점 등을 내세워 강아지와의 애착 관계가 바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이견의 여지가 많은 사상이지만, 적어도 사랑의 본질적 순수성에 입각한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보다는 사람과 강아지 사이의 사랑이 더 본질적 사랑에 가깝다고 충분히 주장할 수 있다고 본다.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둘 중 어느 것이 낫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모든 것은 가벼운 만큼 허공에 뜨게 되어 있으며, 무거운 만큼 가라앉게 되어 있다. 존재도 만유인력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사비나를 보며 한없이 가벼운 존재가 이따금씩 허공에 떠 고뇌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가벼웠던 토마시가 점차 무거워져 가는 모습을 보며 적어도 어느 부분에서는 추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누구에게 존재를 가볍게 해라 무겁게 해라 하고 싶지 않다. 그냥 우리는 그들을 보며 그 존재의 경중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또한 우리는 쿤데라가 비판하는 키치를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키치를 비판하는 것 또한 키치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예상컨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키치 없이 정상 작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카레닌에 대한 테레사의 사랑을 보며, 우리도 스스로가 정의했던 사랑이라는 개념을 다시 한번 되뇌어 보길 바란다. 우리의 사랑에 순수성은 어디 있는가? 어쩌면 테레사의 관점에서 우리는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여기고 있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