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주어진 292,000시간
하루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 16시간. 24시간 중 자는 시간 6시간 30분과 밥 먹는 시간 1시간 30분을 제외하면 그것이 남은 시간이다. 결국 나는 살아갈 날에 16시간을 곱하면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삶의 총량일 것이다. 10년을 더 살 수 있다면 58,400시간. 30년을 더 살 수 있다면 175,200시간. 50년을 더 살 수 있다면 292,000시간. 2021년 기준 남자 평균 수명이 80.6세인 것을 보면, 나에게 남은 시간은 대략 292,000시간 언저리일 것이다. 즉, 이 삶은 잠을 자고 있지 않고, 밥을 먹고 있지 않은 나에게 현재 292,000시간을 부여하고 있다.
그럼 내 삶의 총 시간 중 하루는 약 0.005%다. 이틀이면 약 0.01%. 어떻게 살든 100%를 향해 나아간다.
0.005%밖에 안 되는 작은 숫자가 삶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왜 이리 크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마도, 끝이자 죽음을 상정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죽음을 인식하고 있지만,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인간이기에, 내 수명이 얼마 남았는지에 대해 막연한 호기심을 제외하곤 접근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비록 평균 수명이지만, 내 수명을 시간으로, 그것도 남은 시간으로 표현해 보니 죽음을 향해 착실히 나아가는 존재의 불행과, 한치도 그 발걸음을 허투루 내딛고 싶지 않은 찬란한 삶에 대한 의지가 엇갈리며 나를 내 삶 그 자체에 빠져들게 한다.
나는 이 0.005%의 하루를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나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어느 때마다 '그래서 지금 이 정도면 만족할 수 있니?'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 때때론 '응!'이라는 대답이 나오지만, 대부분 '더!'를 외치고 있다. 내 삶이 99.995% 채워졌을 그날에, 죽기 하루 전 그날에도 똑같은 질문에 나는 '응!'보다는 '더!'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삶의 게이지가 90%가 넘었을 때도, 나는 잘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여전히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삶은 완전한 만족의 부재와 함께 내 삶의 방향, 태도, 행위에 대한 의구심과 확신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역설적이게 이런 존재의 불행은 삶의 완전한 만족을 삶의 목적으로 설정했을 때 숙명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예견 가능한 불행 앞에서도 내 삶의 목적은 바뀌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왜일까? 죽음이 확실시된 삶 앞에서의 가련한 순응일까, 그럼에도 그런 불가피에 맞서는 결연한 의지일까.
영원히 결론지을 수 없을 것 같은 이 질문과 함께, 내 삶의 0.005%는 착실히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