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곳에 다다랐을 때
지금까지 살면서 딱 한 번 간절히 빌어본 기억이 있다. 길진 않았지만 몇 분 정도 두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을 꼭 모은 채 간청한 적이 있다. 그 대상은 바로 흔히 말하는 '신'이라는 존재였다. 기독교 신자에게의 예수, 이슬람교도에게의 알라신, 그 어떤 종교의 유일신이었을 것이다.
종교를 가져본 적도, 그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못 해온 내가 딱 한 순간에 그 이름 모를 신에게 내 온 마음을 의탁했던 것이다. 그 순간은 내가 절벽 끝에 몰렸을 때, 더 이상 나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맞닥뜨렸을 때다. 바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날이었다.
아버지가 계신 심혈관계 중환자실 맞은편 가족 휴게실 앞에서, 나는 아버지가 계신 중환자실 쪽을 바라보며 간절히 빌었다. '신이 정말 계시다면, 아버지를 낫게 해주세요. 여태 믿지 않아서 염치없지만, 부탁드립니다.' 벌써 7년이나 지난 순간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런 뉘앙스였다.
신이 정말 계신다 한들 여태 신의 존재를 부정하다시피 한 사람의 말을 들어주겠소냐. 다음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렇지만, 나는 신을 원망하거나 하진 않았다. 애초에 신이 아버지를 멀쩡히 살려줄 거라는 기대도 없었는지 모른다. 그냥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내게 나를 의탁할 수 있는 강력한 어떤 존재가 필요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아버지의 죽음 속에서 발견한 과녁은 나 자신이었다. 잠깐 내 인생을 비관하기도 했다. 그런 비관 속에서 '내게 왜 이런 불행이 찾아온 것일까?'라는 생각과 함께 거실에서 목놓아 운 적이 있다. 답을 찾지 못한 채, 쏟아부은 눈물과 지나가는 시간들이 나를 점차 치유해 줬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죽음에 대해 진지한 고민 한 번 해본 적 없는 철없는 대학생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상당히 큰 고통이었을 것이라는 측은함과 그런 상황 속에서도 지금까지 잘 이겨내 왔다는 대견한 마음이 든다.
누구나 인생에 불행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가족의 죽음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피할 수 있다고 피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결국 해답은 하나뿐이다. 불행을 이겨낼 수 있는 자신을 만드는 것. 갑자기 찾아오는 불행을 신에게 스스로를 의탁함으로써 극복할 수도 있다. 내가 유일하게 떠올렸던 신은 바로 내가 감당할 수 없었던 불행에 맞닥뜨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더 이상 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난 절벽 끝에 몰려도 스스로에게 답을 물을 것이다. 지금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두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을 모은 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이 불행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것인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그리고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 나가야 하는가?' 돌이켜보면 불행 역시 하나의 순간들에 불과하다. 그런 불행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간이고, 그게 나다.
내가 유일하게 신을 찾았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그 신의 자리에 나를 위치시킨다. 나는 신이 아니라, 나는 나에게 신과 같은 존재여야만 한다.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예수처럼, 이슬람교도들에게 있어 알라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