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깨달은 현존
화창한 어느 날, 거제도에 위치한 바람의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여행의 유용한 동반자였던 캠핑용 의자를 한가운데 펼치고 뜨거운 햇빛도 마다하지 않은 채 한 시간여를 저 멀리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온갖 상념을 안고 떠나 온 여행이기에, 이 대자연에서 그 상념 보따리를 풀어놓고 가도 되겠지 싶어 하나씩 질문을 던졌다. '최근에 나의 심적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대자연이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선물해주진 않았다. 넓고 푸른 하늘과 바다를 본들, 집에서 찾지 못했던 답이 갑자기 나타날 리 없다.
그런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 세례 중 어느 한순간 모든 생각을 멈추고 하늘과 바다, 숲만 응시한 채로 있었다. 그 순간, 내가 지니고 있던 상념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의 행복함에 집중했다. 아름다운 자연 아래 혼자 앉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만이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이 바로 현존의 순간이라고 믿는다. 온갖 생각에서 벗어난 상태, '생각하는 나'가 아니라 '생각하게 만드는 나'에 집중한 순간.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에 갑자기 감격스러움이 느껴지고, 지금 이 순간에 여기에 나를 있게 해 준 사랑하는 이들이 떠올라 차오르는 행복감을 만끽했다. 벅찬 마음에 눈물이 나기도 했다.
내가 만들어낸 '미래의 나'라는 훌륭해야만 하는 에고가 씌워진 존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의 나에겐 현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실, 현실에 충실하면서 여기까지 잘 왔다. 이젠 조금 더 영적 측면에서 현실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라는 시간에 얽매인 내 존재를 가상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나에게 집중해보려 한다.
그때는 그 느낌이 현존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되었다. 그때의 그 모든 것이 가벼워지는 순간, 행복에 둘러싸이는 순간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난 현존의 순간들을 기록해나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