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연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죽음의 선구성 및 불안은 인간 현존재로 하여금 더욱더 강한 정도로 일상세계 안으로 빠져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죽음의 선구성이 일깨우는 불안으로 인해 현존재는 자신의 일상적 자기가 비본래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는커녕 도리어 망각하기를 원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도구적 의미 연관이 지배하는 친숙한 일상세계에 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조금씩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이 잡히기 시작한다. 존재의 탈은폐와 은폐, 죽음의 선구성, 존재의 도구성, 알레테이아 등 이전에 읽었던 『하이데거 읽기』가 밑바탕이 되어 조금 더 그 핵심적 개념들에 가깝게 다가간 듯한 느낌이다.
일단, 철학에 대한 이해 이전에 책에 대해 평하고자 한다. 현대에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화가들의 작품과 그들의 인생 및 작품관을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들과 연관 지어 시각화해서 독자들에게 직접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 전개 방식에 굉장한 찬사를 보내고 싶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난해함은 그 설명들이 눈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면이 있는데, 그 장벽을 구성으로 잘 풀어내 독자로 하여금 하이데거의 철학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했다고 본다. 나 같은 초심자는 물론이거니와 하이데거에 관심이 있고 어느 정도 공부를 한 사람에게도 그 유익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거 같다.
시기가 묘하게도, 죽음이라는 것에 다방면으로 접근하고 있는 요즘의 나에게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의 선구성'이라는 개념이 일정 부분 답을 내려줬다. 난 늘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의문을 가져왔다. '누구나 죽음을 알면서도 왜 본인은 절대 죽지 않을 사람처럼 행동하는 걸까?' 내가 보는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는 마치 그들은 절대 죽지 않는 사람의 근원적 설정이 깔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반드시 실현될 가능성인 죽음을 이해한 채로 그 앞에서 철저히 일상세계로 파고들게 된다고. 나는 그 상태를 의구심을 가졌던 인간의 의도적인 죽음의 외면에 기반한 행동과 같다고 본다. 필멸하기 때문에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 회피성이 일상으로 파묻히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게 아닐까? 마치 죽음의 선구성이 존재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필멸하기 때문에 이 세계와 나를 분리할 수 있는 매개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세계에 존재하는 나'가 아닌 '그냥 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개념이 현존재까지 이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 존재의 도구성에 대한 개념이 나의 평소 철학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느껴졌다. 모든 존재는 자신을 기준으로 나 이외의 존재를 기본적으로 도구로서 여긴다는 하이데거의 사유가 삶의 모든 것은 나의 시점과 기준으로 이루어진다는 나의 사유는 각각의 사유가 가진 긍정/부정성을 떠나 주체성이라는 측면에서 겹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의 철학적 사유에 내가 평소 갖고 있는 철학과 고민을 입혀 보니 나 스스로에게 새로운 사유의 길이 열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이해했다고 하기에도 뭐하지만, 한발씩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