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지금 살아 있다는 것 ㅡ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
103p
암 선고를 받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의 글을 모아 놓은 구성의 책. 개인 김진영의 일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일기에 어떤 흥미가 느껴지겠냐만, 이 사람의 수많은 짧은 글들을 보며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죽음의 선구성을 가진 인간이 마침내 그것이 눈앞에 구체화되었을 때 어떻게 되는지 한 방향을 아주 명료하게 발견할 수 있다. 생에의 극복 의지 혹은 완전한 좌절 그 두 길 중 저자는 전자를 선택한다. 때문에 김진영은 계속 삶을 노래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고,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그래도 난 행복하다!'라고 외친다. 이런 의지에 존경심이 들면서도 슬픈 감정이 엄습한다. 나도 죽을 몸이고, 결국 죽음 앞에 처절해질 것을 예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처절한 삶에의 외침에서 나는 죽음 앞에 선 필멸하는 인간의 몸부림을 발견한다.
곧 떠나 없어질 이 삶에 미련이 없는 듯 글을 쓰지만, 그 내면에는 사라져가는 삶을 어떻게든 붙잡고자 하는 애절함도 보인다. 삶이란 그런 것일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런 것. 한 가지는 분명하다. 죽어가는 순간은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 순간들과는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나는 죽어 사라져가고 있지만, 지금 이 공간에 나는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 나는 이 죽음 앞의 애절함이 비로소 인간을 현존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로지 내 삶에만 몰입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죽음이 내 눈앞에 그려지는 순간이 아닐까? 에크하르트 톨레가 말했던 현존은 죽음을 목도한 순간의 경지였던 것인가.
필멸 앞에서 비로소 인간은 현존할 수 있는 것이다. '내일 죽어도 좋다.'라는 말이 이런 사고에서 발생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금 이 생을 만끽하는 것이 마치 내일 죽는 사람의 그것과 같기에. 그러므로, 인간의 최종 도착지는 죽음이지만 그와 동시에 진정한 현존의 순간이기도 하다.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라는 말도 이제는 이해가 간다. '현재를 즐겨라.'라는 말이 단순하지만 결코 달성하기 어려워 격언으로 여겨지는 이유도 이제는 알 것만 같다.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려는 그의 마지막 노력 앞에서, 다소간 맹목적 믿음에 대한 위험이 엿보이기도 하나, 그건 오로지 저자의 몫이 아닌 남겨진 자들의 몫이기에 전혀 고려할 요소가 아니다. 곧 사라질 자에게 믿음이 맹목적이든 아니든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게 내 삶의 종말에서 안도감을 찾을 수 있다면 오히려 좋다는 생각이다.
그의 애도 일기 앞에서, 필멸하는 인간의 처절함과 애절함이 느껴지고, 나 역시 그렇게 사라질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죽음 앞에 나는 과연 어떻게 그 절대자를 마주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