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아메리 『자유죽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왜 자살을 했거나 시도하는 사람들은 끝끝내 사회의 마지막 남은 별종 취급을 받아야 할까 하는 물음이다. 그럼에도 자살 시도에 성공한 사람은 매몰차게 잊어버리고, 자살 시도에 실패한 사람은 정신병자 취급하는 게 인간적인 태도일까? 인간적인 정서로 보자면 그들을 먼저 따뜻하게 품어 안아야 하는 게 아닐까?
기존에 갖고 있던 자살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철폐하고, 새로운 관점이 들어서게 됐다. 나는 자살을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자들이 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그걸 이겨내지 못한 자들이 하는 일종의 도피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도피 속에 숨겨진 의미다. 나는 자살을 일종의 수동적이면서, 어쩔 수 없이 자살자에게 행해진 삶의 포기 압박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장 아메리는 자살을 자유죽음이라는 단어로 치환함과 동시에, 관점을 수동에서 능동으로 과감하게 전환시킨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건 오로지 자살자 개인의 능동적 행위이며, 위대한 저항이 된다. 같은 상황이 극적으로 다른 해석이 되는 것이다.
자칫, 저자가 자살을 옹호하고 예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저자는 자유죽음이란 결국 무의미임을 일갈한다.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고통과 역경을 벗어난다는 개념 자체는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모순이다. 중요한 건 죽음이 아니라 자유인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에 의한 수동적 선택이 아니라 철저한 개인의 능동적 선택인 것이다.
자살자 혹은 자살을 시도한 자를 향해 그 어떤 위대한 분석을 들이댄다고 한들, 오로지 삶을 마감 짓는 건 개인의 몫이다. 저자는 결국 한 개인의 용기 있는 결단에 원인을 찾고 이렇니 저렇니 가타부타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우리가 안타까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향해 보내는 연민과 포용을 자살자와 자살을 시도한 자들에게도 보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주체의 입장에서 자유죽음을 실행한 자는 본인에게 가해진 어떤 역경과 고난에 벗어나고자 그것을 삶의 종결로써 저항하고자 하는 용기 있는 자임이 틀림없으며, 객체의 입장에서 그들은 소중하게 주어진 삶을 스스로 끊어버렸다는 점에서 비난을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처지에 따뜻한 연민을 보내야 한다.
죽을 때가 되어서 자유죽음을 선택하는 자들과 역경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자유죽음을 선택하는 자들은 근본적으로 같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스스로 삶을 정리하고 종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갖고 있던 자살, 자살자들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철폐한다. 자살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인 생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자살자는 그런 용기 있는 자인 것이다.
삶의 종결까지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강인한 의지의 존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