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파탄과 속죄
인간의 마음은 모든 세계를 포용할 만큼 넓고 모든 짐을 짊어질 수 있을 만큼 용감하지만, 그 짐을 벗어던질 용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로드 짐 2> 159~160p
짐이라는 사람을 통해 나약함 혹은 책임감 혹은 용기 등 의미가 다소 맞지 않는 혼재된 인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이 언밸런스한 의미의 조합들은 작품 내에서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룬다. 어떻게 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우리 인간은 모두 나약함과 책임감, 용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제3자의 말을 통해 주인공을 다루는 형식은 지금은 클리셰라고 볼 수 있는 방식이지만, 당시에는 거의 최초로 콘래드가 선보였다고 한다. 작품 해설을 보면 짐의 다양한 모습과 진솔함을 표현하기 위해 전지적 작가를 넘어서는 제3자의 조명을 활용했다는데, 솔직히 그런 전문적인 접근을 통한 분석은 잘 모르겠고 짐의 인격적 특성은 확실히 잘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소 지루했다는 게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특정 상황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장황하기도 하며, 콘래드 소설의 특징인지 모르겠는데 가독성이 기막히게 안 좋다. <암흑의 핵심> 때도 그랬던 거 같은데 정말 안 읽히긴 엄청 안 읽힌다.
침몰하는 배의 사람들을 버리고 탈출을 감행한 선원 짐, 필요치 않은 동정심으로 마을을 피바다로 만든 짐의 모습은 겹쳐 보인다. 도덕적으로 그는 파탄 나야 마땅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이후를 보면 약간 생각이 달라진다. 배에 승객을 버리고 탈출한 선원은 여럿이지만 처벌은 오로지 짐 혼자만 받았다. 그것도 도망칠 수 있음에도 제 발로 법정에서. 마을을 피바다로 만든 짐은 도망치자는 애인의 부탁에도 그녀를 뿌리치고 책임감을 느낀 채로 죽음 앞에 선다. 이 두 가지 다른 사건의 동일한 흐름을 통해 짐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도 명확히 보여주며, 도덕적 파탄과 속죄의 과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짐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을 했지만 그가 그 행동에 대한 대가를 피하지 않고 속죄한다는 점에서 동정심을 느끼고, 그의 영웅적 면모를 보게 된다. 최후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짐을 욕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아마도, 그가 평생을 자신의 죄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닌 채 속죄의 마음을 갖고 살아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조셉 콘래드의 <로드 짐>은 작품 외적으로도 시사점을 던져준 책이다. 마치, 이 책의 설정이 아프리카를 침략하는 유럽권 나라를 불변의 전제로 깔아 둔 것 같다는 점이다. <암흑의 핵심>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서 확신이 들었다. 유럽권 -> 아프리카의 침략 방향은 거의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떠돌다가 원주민 사회에 정착해 리더가 되는 짐, 그 원주민 사회를 침략하는 브라운. 그 사회를 보호&쟁탈하려는 그 둘의 싸움. 전개는 오로지 침략자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었다. 가장 큰 피해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인데 말이다. 집필 시기에는 당연한 것일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이 당연한 전제가 꽤 불만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결국 짐도 침략자였을 뿐이고, 잠깐의 오판으로 자신이 거느린 원주민들을 죽게 만들었을 뿐이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시선에서 이 작품을 바라본다면, 이 작품의 가치 자체가 하락하게 될 것이며 짐의 도덕적 파탄 및 속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 것 같은 전제는 이 작품의 집필자 입장에서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작품의 메시지 전달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니까.
뭔가 철학적이면서도 폭력적이고 야성적인 조셉 콘래드의 책들은 손이 잘 안 가는 것 같다. 가독성도 매우 떨어지고... 문학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기에 다른 작품들도 읽기는 하겠다만, 당분간은 자제해야겠다.